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겨울 한파가 찾아오면 자주 뇌까리는 단어가 있다. '을씨년스럽다', '날씨나 분위기 등이 몹시 스산하고 쓸쓸한 데가 있다'는 뜻이다. 추위에 옷깃을 여미며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지만 예사말이 아니다. 민족의 비참함과 울분이 담겨 있다.

이 말이 잉태된 때는 고종 광무 9년 1905년 11월 17일이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호가 바뀐 지 8년이 지난 을사(乙巳)년이다. 이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기는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이제 일본의 속국이 됐다. 국민들은 치욕스러워 대성통곡하는 것 이외 속수무책이었다. 이날 날씨마저 무척 추웠다. 정신과 육체가 모두 얼어붙었다.

몇년 동안 일본인도 아니고 대한제국인도 아닌 우리 조상들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을사년 하면 치를 떨고 몸서리쳤다. 앞으로 닥쳐올 일제의 무자비한 식민통치에 대한 공포감이나 두려움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을사년, 원수 같은 을싸년, 생각하기도 싫은 을씨년. 을싸년만 없었더라면'등 우리 조상들은 이구동성 중얼거렸다. 이렇게 떠돌던 표현들이 추위에 휩쓸려 '을씨년스럽다'로 이어졌다. 을사년이 '을씨년'으로, 명사 '을씨년'에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사 '~스럽다'가 붙었다. 혹한으로 마음마저 쓸쓸한 분위기를 표현하는 단어가 됐다. 일제강점기를 벗어났지만 아직도 겨울이 되면 회자된다.

어디엔가 깊이 매장해야 하거나 박물관으로 보내야 할 단어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언어의 의미가 시대 상황에 따라 진화하듯 '을씨년스럽다'도 마찬가지다. 추위와 관련 없이 '살림이 매우 가난한 데가 있음'을 표현하는 의미도 부가됐다. 어찌 보면 잘난 조상들 때문에 우리글 어휘가 보다 풍부하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한 가지 더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돌아가는 나라 상황 말이다. 경제는 바닥을 모르고 추락한다. 정치는 퍼주기 일색이다. 곳간이 비어간다. 어찌 채울 것인가. 추위와 가난, 그리고 퍼주기 정치에 국민들은 무척 을씨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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