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대성중서 코치 시작 국가대표선수만 17명 배출
“희생정신 지키기 위해 노력”

[충청투데이 심형식 기자] “예(禮)로 시작해 예로 끝나는 운동이 유도입니다. 손가락질 받을 짓 하지 말라고 배우고, 배운대로 가르쳤는데 좋은 제자들을 만나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의암 강형원(80·사진) 선생은 유도계의 큰 스승으로 불린다. 1954년 청주 주성중 2학년 때 영화관람을 위해 찾은 상무관에서 경찰들이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고 유도에 매료됐다. 당시 유도부가 있는 학교가 없어 상무관에서 운동하며 유도인의 길을 시작한 의암은 용인대의 전신인 한국유도학교에 진학했다. 선수 시절 의암은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다. 의암의 진가는 지도자의 길에 들어선 후 드러나기 시작했다.

의암은 1964년 대성중에서 유도부 코치로 지도자를 시작했다. 1966년 대성중 교사로 발령받은 후 1978년 유도 명문 청석고로 옮겨갔다. 35년간의 지도자 생활 중 의암이 길러낸 선수만 수천여명을 헤아린다. 그 중 국가대표만 17명을 배출했다.

1981년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유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박종학 청주대 교수를 비롯해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조인철·전기영(용인대 교수) 등이 의암의 제자다.  의암이 좋은 제자를 많이 길러낸데는 자질이 있는 선수를 찾아내는 그의 눈썰미와 함께 제자를 향한 헌신을 꼽을 수 있다.

충북은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소년체전 7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당시 위업을 이어가기 위해 충북에서는 남·북·중부에서 우수 신인선수 발굴대회가 열렸다. 의암은 현장을 누비며 좋은 재목을 골라냈다. 선발된 선수들은 대성중으로 전학했다.

학교에서 운동부를 지원하는 시스템이 정비되기 이전이라 숙소는 의암의 집이 됐다. 많을 때는 17명까지 의암의 집에서 머무르며 운동을 했다. 그 수발은 온전히 부인의 몫이었다. 학교에서 나온 지원은 쌀 서말 값이었지만 선수들은 그 이상을 먹었다. 모자라는 식비 역시 의암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그렇게 가르침을 받은 선수들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도인으로 성장했다.

지도자를 마친 의암은 충북유도회장, 대한유도회 심판위원장, 한국중고연맹회장, 한국유도원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유도인의 삶을 이어갔다. 충북유도회장 시절에는 조인철의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을 기념한 세계제패기념관 건립을 이끌어냈다. 2004년 준공된 청주유도회관이다. 지금 청주유도회관은 비시즌 전국 유도부의 전지훈련이 몰리며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5월에는 그의 팔순을 기념하는 유도대회를 500여명의 제자들이 힘을 모아 개최하기도 했다. 온전히 유도인의 삶을 살아온 의암은 “유도는 평생을 살아간 길잡이였다”며 “남에게 봉사하고 예의를 갖추며 뒤에서 희생하는 정신이 유도의 정신으로 이를 지키며 살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어 “살아온 방식대로 35년간 가르친 제자들이 감사의 표시를 해준 것이 무엇보다 고마웠다”고 덧붙였다.

심형식 기자 letsgohs@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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