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5. 이완용, 溫陽에서 경찰권 넘기다
조선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매국노 이완용 애호했던 온양 온천
李, 요양중 대한제국 경찰권 위탁조인 서명…강제합방 걸림돌 제거

 

▲ 조선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친일파의 선봉에 섰던 이완용은 온양온천을 애호했다고 한다. 사진은 온양온천이 자리한 아산 시가지 전경. 아산시청 제공

조선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은 온양 온천을 무척 좋아했다. 1907년 1월 24일 황태자 순종과 친일파 거두 윤택영의 딸(순정효황후) 결혼식에 참석했던 이토 히로부미는 곧 바로 온양으로 내려와 5일간이나 머물렀다.

을사보호조약을 강압적으로 성사시킨 그는 5일 동안 온양에 머물면서 통감부 고관들을 불러 내리는가 하면 친일파 중신들을 호출하여 향후 대한제국의 운명을 요리할 음모를 꾸몄다.

과연 그렇게 하여 헤이그 밀사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고 또 다시 온양에 내려와 온천에 뭄을 풀면서 아예 조선을 합병시킬 흉계를 구체화 시켰다. 그러나 그는 이년도 못가 1909년 안중근 의사에 의해 하얼빈에서 총을 맞고 죽었다.

어쨌든 이렇게 온양온천을 좋아했던 이토 히로부미에 못지 않게 당시 친일파의 선봉에 섰던 이완용 역시 온양 온천을 애호했다. 내각 총리였던 이완용은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에서 있은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오다 이재명 의사의 습격을 받았으나 겨울이라 두터운 외투를 입어 죽지는 않고 부상만 입었다. 이때 입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그는 온양에 내려와 이듬해 7월까지 머물렀다.

그런데 하루는 잠을 자는데 천정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는 머리 맡에 놓고 있던 권총을 꺼내 천정을 응시했다 순간 또다시 수상한 소리가 나자 그곳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심야에 울려퍼진 총성에 놀란 경호원들은 총검을 들고 이완용 방으로 달려 왔다 호위 장교 한사람은 이완용이 가리키는 천정을 긴 칼로 마구 쑤셨다.

그러나 천정에서 쏟아진 것은 괴한이 아니라 쥐똥이었다. 쥐들이 설치는 소리를 또 자객이 숨어 들었나 착각했던 것이다. 이날 밤 쥐소동은 비밀에 붙였으나 며칠도 안돼 장안의 화제가 됐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온양에 있는 이완용에게 들이 닥쳤다. 그것은 다름아닌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일본에 넘기라는 것. 일본인 산변건태랑이 쓴 '日·韓병합사' 그리고 '한국현대사'(신구문화사·3권 민족 저항)에 의하면 1910년 6월 23일 통감부에서 오꾸라 비서관을 요양 중인 이완용에게 보내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이완용은 이 핑게 저 핑계로 이를 거절했다. "내가 요양 중이고 박제순이 나를 대신해 총리 서리를 맡고 있으니 그와 상의하라"는 것이 이완용의 주장.

당황한 통감부는 온양 현지에 내려간 오꾸라에게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이완용의 서명을 받아 오도록 독려하는 한편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한국 경찰권 위임에 대한 사항은 새로 부임하는 데라우찌 통감의 지시에 따른 것임. 본관은 각하게서 협력을 함으로써 제국이 바라는 경찰권 위임이 순조롭게 이뤄졌다는 보고를 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함.

이에 이완용은 지체없이 경찰권 위탁에 관한 문서에 서명을 하고 말았다. 그동안 쌓아온 친일 매국 행각이 물거품이 될 것을 두려워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대한제국의 경찰권 위탁 조인이 1909년 6월 24일 오후 8시 이뤄졌고 드디어 8월 29일 이 나라를 강제합방시키는 큰 걸림돌을 제거한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 항일운동이 들끓기 시작했고 온양에 있던 이완용은 언제 습격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로 서둘러 상경했다. 온양 온천은 이렇게 큰 국난의 상처를 안고 있다.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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