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스와 흄·그랜트와 셔먼·밀러와 먼로 등…길이 남을 만남 15선

둘이 만나니 역사가 됐다…신간 '두 사람의 역사'

스미스와 흄·그랜트와 셔먼·밀러와 먼로 등…길이 남을 만남 15선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동서고금 모든 역사에는 중심에서 그것을 움직인 인물이 존재한다.

위인으로 일컫는 인물이 있고 악인 또는 논쟁적 인물도 있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잘 알려진 역사적 인물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된 장면이 적지 않다.

신간 '두 사람의 역사(북캠퍼스 펴냄)'는 이러한 역사적 인물들의 '연결'에 초점을 맞췄다. 역사책에 남은 인물 간 만남이기도 하지만, 그 둘이 만났기 때문에 후대에 역사로 기록될 수 있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예컨대 자유주의 경제학의 초석을 놓은 '국부론'은 애덤 스미스의 위업이지만, 데이비드 흄과 오랜 교분이 없었다면 그처럼 뛰어난 저작이 되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스미스는 저녁 식탁에 올릴 빵이 빵집 주인의 '자비'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이익'을 내려는 마음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렇게 자유주의 경제이론을 옹호한 스미스였지만, 사실 그는 자유에 따르는 책임도 매우 중시했다. 또 개인의 사회적 자질이 충분치 않을 때 국가가 개입해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이런 철학에는 친구였던 흄의 사상이 어떤 식으로든 서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흄은 '존재에서 당위는 추론되지 않는다'는 유명한 명제를 통해 존재와 당위가 다르다고 분명히 구분했다. 당위를 존재 자체보다 우선하는 사고를 강력히 비판한 것이다.

흄에 따르면 이성은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다. 이성을 바탕으로 한 당위는 '해야 한다'고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살인은 그 자체로는 매우 이성적인 행위일 수 있지만, 혐오감을 부르고 인간성을 해치므로 심판을 받는다.

결국 흄과 스미스의 철학에는 책임이 따르지 않는 자유는 없다는 정신이 존재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번엔 전쟁터로 가보자.

미국 남북 전쟁(Civil War)에서 북부연방을 지휘한 율리시스 그랜트와 윌리엄 셔먼의 만남이다. 최대 격전 중 하나였던 1862년 4월 '실로 전투'. 북부연방군과 남부연합군이 격돌해 양쪽 모두 큰 피해를 봤다.

초반 불리한 전황에도 용맹하게 싸운 셔먼 장군은 이후 영웅으로 대우받지만, 상사였던 그랜트 장군은 남부연합으로부터 기습을 당할 만큼 부주의했다는 비난과 조롱에 직면한다. 게다가 '음주 지휘' 의혹까지 제기되며 지휘권을 잃는다.

해임 요구까지 빗발쳤지만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그랜트를 옹호했다. 그러나 이미 상심한 그랜트가 군복을 벗으려 할 때 셔먼은 "그랜트는 내가 제정신이 아닐 때 내 편이 돼줬다"며 강하게 만류했다.

심기일전한 그랜트는 이후 여러 차례 큰 전투에서 이겨 링컨의 신임을 회복했고, 지휘 재량권까지 얻었다. 큰 상처를 남긴 내전이 끝난 뒤에는 대통령 자리에 올라 연임까지 한다. 모두 셔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그랜트와 셔먼은 아군 희생을 줄이고자 무자비한 '초토화 전략'을 썼다. 그러면서도 '전쟁 명분은 정의일 수 있으나 전쟁 자체는 정의일 수 없다'는 점에도 생각을 같이했다.

그랜트는 "직업군인이지만 전쟁을 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고 회고했고, 셔먼 역시 "전쟁은 지옥"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두 사람은 큰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그랜트가 정치에 뛰어드는 바람에 말년이 힘들었던 반면, 셔먼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만큼 정치권에 거리를 뒀다.

사제 지간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만남을 시작으로 하는 책은 넬슨 만델라와 프레데리크 벨렘 데 클레르크의 만남까지 15개 장면으로 구성됐다.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의 만남은 '대립'의 코드였지만, 아서 밀러와 메릴린 먼로의 만남은 '사랑'이었다.

저자 헬게 헤세는 독일의 기획자이자 단편영화 감독이면서 역사 칼럼니스트이다.

마성일·육혜원 옮김. 396쪽. 1만6천500원.

lesl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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