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린 뿌리와 얼크러진 마디>

후한(後漢)6대 황제인 안제(安帝)때의 일이다. 안제가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모후(母后)인 태후(太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고 태후의 오빠인 등즐(鄧?)이 대장군이 돼병권을 장악했다.

그 무렵 서북 변경은 티베트 계(系) 유목 민족인 강족(羌族)의 침략이 잦았다. 그러자 등즐은 국비부족을 이유로 양주(凉州:감숙성)를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낭중(郎中) 벼슬에 있는 우허가 반대하고 나섰다.

“함곡관(函谷關)의 서쪽은 장군을 내고 동쪽은 재상을 낸다고 했습니다. 예로부터 양주는 많은 열사와 무인을 배출한 곳인데 그런 땅을 강족에게 싸워보지도 않고 내준다는 것은 당치 않은 일입니다. 우리의 옛 기록을 더듬어도 양주 출신의 뛰어난 무인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좋은 땅을 넘겨준다는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말에 좌중에 모여 있던 대신들이 우허의 의견을 좇자 등즐의 의견은 묻히고 말았다. 중신들은 모두 우허와 뜻을 같이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우허를 미워하는 등즐은 때마침 조가현(朝歌縣 :안후성 내)의 현령이 비적(匪賊)에게 살해되었다는 예기를 듣고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우허를 후임으로 정하고 비적 토벌을 명했다.

친구들은 우허가 도저히 살아올 수 없을 것이라고 모여 걱정했으나 우허는 오히려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서린 뿌리와 얼크러진 마디(반근착절:盤根錯節)에 부딪쳐 보지 않고서야 어찌 칼날의 예리함을 알 수 있겠는가.”

현지에 도착한 우허는 우선 전과자들을 모아 적진에 침투시킨 다음 갖가지 계책으로 비석을 토벌해 버리고 의기양양해서 되돌아왔다.

후에 이민족들과 싸웠을 때도 종횡으로 그 기지(奇知) 떨쳤다. 그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공을 세워 높은 벼슬에 오르기는 했으나 타고난 강직성(剛直性)을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궁정의 측근이나 환관들에게 미움을 받아 여러 번 형(刑)을 받았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고 권위(權威)와 싸우다가 죽었다.

끝까지 반근착절(盤根錯節·서린 뿌리와 얼크러진 마디)에 도전을 계속했던 것이다.

<국전서예초대작가·청곡서실운영·前대전둔산초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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