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 역사유람]
2. 淸·日전쟁 마당된 牙山, 성환
조선정부 요청에 청군 아산만 상륙, 새벽 日해군 기습에 북양함대 전소
풍도해전 이어 평양 전투서도 대패, 두토끼 잡은 日, 조선 식민지화 시작

▲ '아산이 무너지나, 평택이 깨지나' 하는 속담이 청·일전쟁 때문에 생겼다는 설이 있다. 사진은 청·일전쟁이 벌어졌던 성환 종축장 전경. 천안시 제공
충남 아산에는 충무공 이순신이 있고 바로 이웃인 평택에는 원균이 있다. 임진왜란 때의 주역들이면서도 서로 적대관계에 있는 라이벌이었다. 그래서 '아산이 무너지나, 평택이 깨지나' 하는 속담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사실 지금도 아산과 평택은 아산호 경계선을 비롯 여러가지로 분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청·일전쟁 때문에 '아산이 무너지나, 평택이 깨지나' 하는 속담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평택에는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아산에는 청군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어느 쪽이 이기느냐 하는 말이 그렇게 형성됐다는 것이다. 청군이 동학군을 진압시켜 달라는 조선 정부의 요청에 따라 충남 아산만에 상륙한 것을 핑계로 일본군 역시 1894년 6월 인천에 상륙했다. 상륙한 일본군은 제5사단과 제9혼성여단으로 오오시마 육군 소장이 이끌고 있었다.

아산 앞바다에는 정여창제독이 이끄는 청나라 북양함대가 버티고 성환읍과 둔포 사이에는 2500명의 육군이 주둔해 있었다. 또 다른 부대는 전봉준의 동학군을 공격하기 위해 공주로 행군을 시작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와 같은 청나라의 강력한 병력으로 동학군을 정벌하고 이참에 일본군도 몰아내 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실책이었다. 우리 정부가 청나라에 기대를 걸고 SOS를 친 것이 얼마나 큰 실책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은 바로 그해 7월 25일 새벽, 일본 해군의 순양함 3척에서 청나라 북양함대를 향해 쏟아진 함포 사격이 시작된 순간부터였다. 이 기습작전에 청나라가 자랑하던 북양함대는 무참히 무너졌다. 모든 배가 화염에 휩싸였고 동원된 민간상선까지도 침몰했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 군사 1100명이 죽었다. 일본은 단 1명의 전사자도 없이 완승을 거두었고 역사는 이 전투를 아산만 풍도에서 발생하여 '풍도해전'이라 기록하고, 더 크게는 '청·일전쟁'이라고 부른다.

▲ '아산이 무너지나, 평택이 깨지나' 하는 속담이 청·일전쟁 때문에 생겼다는 설이 있다. 사진은 청·일전쟁이 벌어졌던 성환 종축장 전경. 천안시 제공
풍도해전은 곧바로 육지에 불을 당겼다. 아산 둔포와 성환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향해 평택에서 내려온 일본군이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일본군은 풍도해전의 승리로 사기가 올랐고 반대로 청군은 사기가 꺾인데다 보급선마저 끊긴 상태였다. 이번에도 일본은 기습작전으로 청군의 허를 찔렀다. 그해 7월 29일 밤, 일본군 3개 중대가 방주산에 진을 치고 있던 청군을 공격·장악했으며 이어 월봉산까지 손에 넣었다.

청·일전쟁의 피크는 지금 성환 종축장일대에서의 전투였다. 숫적으로는 청이 많았으나 전술면에서 제대로 훈련된 일본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청나라 군사들은 성환과 둔포에서 후퇴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후퇴도 인천과 서울지역을 장악한 일본군이 무서워 청주~원주~홍천~춘천을 거쳐 멀리 돌아서 가는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병사들은 7월 더위에 시달리고 배고픔에 지쳐 산악지대를 힘들게 도망쳤다. 그러다 민가를 덮쳐 약탈도 서슴치 않았다. 그들은 겨우 평양에 도착해 또 한번 전투를 벌였으나 역시 대패했고, 정여창 북양함대 사령관은 자살했으며 일본 시모네세키에서 조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청·일전쟁은 그렇게 끝났다. 이 전쟁의 결과로 청나라는 요동반도와 대만을 일본에 떼어 주고 막대한 보상비를 지불해야만 했다. 동학난에 끼어들었던 청국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고 일본은 '돈 벌고, 땅 얻고' 부자가 된 셈이다.

우리는 동학군 진압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외세를 끌여 들였다가 화만 자초한 꼴이 되었다. 그렇게 믿었던 청군이 맥없이 무너지고 오히려 일본의 지배를 받는 수모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이노우에 카오루 특명전권공사가 노골적으로 조선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으며 한때 허수아비로 불러들였던 대원군을 축출하고 조선 식민지화를 위한 음모를 착착 진행 한 것이다. 그 첫 무대가 된 곳이 아산만과 성환, 그리고 평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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