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묵 대전시 개발위원회장

봄의 꿈도 키우고, 여름의 풍성함도 즐기고, 가을의 열매도 수확했지만, 아직 11월은 할 일이 남아 있는 달이다. 다가서는 연말을 바라보며 한해의 아쉬움을 토해낼지 모르나 분명 우리에겐 두 달이 남아 있다. 한 해의 육분의 일에 해당하는 1400여 시간을 지는 해만 바라보며 안쓰러워한다는 것은 바보스러운 일이다.

들판의 곡식이 모두 떠나고, 산자락의 나뭇잎들이 떼 지어 유랑을 떠났다 해도 분명 11월은 할 일이 남아 있는 달이다. 파르르 떠는 가지 끝의 홍시처럼 자그마한 볕이라도 모으며 한해의 마지막을 가꿔야 한다. 나무들의 치열한 삶을 바라보라. 볕이 필요하니 마지막 속옷까지 벗어던지고 알몸이 되어 태양을 향해 두 팔 벌리고 의연히 생을 추구하고 있지 않는가. 그들의 슬기를 배워야 한다. 풍요로운 내년을 위해 벗어버린 옷가지를 흙속에 묻고, 오늘의 남은 시간에 최선이기에 아름답다.

11월은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 달이다. 다가올 봄의 푸른 날을 꿈꾸며 오늘에 충실히 임하는 11월. 차가운 바람 속에 묻혀 있는 볕을 찾아내고, 그것을 긁어모아 꼭지눈을 데우고, 곁눈도 다독인다. 아무리 추워도 꿈을 놓지 않는 나무들처럼 우리도 11월에는 삶의 의욕을 키우고 남은 시간을 살찌워야 한다. 찾아올 봄을 위해 새눈을 틔우고 찬바람 속에서도 얼지 않게 감싸는 나무들의 적극적인 몸부림을 눈여겨보라.

11월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 달이다. 조락의 끝자락에서 졸고 있는 당신의 육신을 두드려 깨워 산으로 올라 보라. 비록 옷가지를 벗어던진 알몸이라 해도 그들은 결코 추잡하지 않고, 깨끗하다. 알몸만 되면 퇴폐한 인간과는 다르게 경건하다. 그들의 알몸은 최선의 삶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 것을 꺼내 다른 이에게 나누어주고, 심심해하는 바람에도 몸을 맡기며, 그들이 이끄는 곳으로 말없이 굴러가면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기에 나뭇잎은 진흙벌판 위에서도 언제나 경건하다.

11월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 달이다. 농부의 아들이 제 머리통보다도 더 큰 가을을 짊어지고 땀을 흘린다. 비록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어도 즐거움으로 표정은 여전히 밝다. 농부의 아내는 누런 가을을 받아 안으며 배부른 시누이의 해산날을 셈한다. 이제 얻은 수확으로 사랑을 키우는 달이 11월이다.

곡식을 모두 거둬들인 들판은 공허한 빈터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곳은 무수히 많은 생명들이 치열하게 생을 이어가는 삶터이다. 우렁이는 진흙 이불을 덮고 겨울나기에 들어갔지만 숨을 놓지 않고 들숨을 들이킨다. 농부가 남기고 간 벼이삭을 눈치껏 긁어모아 겨울 준비에 여념이 없는 들쥐도 있다. 그들은 비록 작은 먹이라 해도 주워서 곡간을 채운다. 매서운 겨울이 바로 들이닥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봄에 태어날 아이가 있기에 그들은 오늘도 분주하다. 역시 11월이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 달임을 알고 있다.

한 해를 열두 달로 가른 것은 인간의 편리를 위해 만든 매듭에 불과하다. 그 열한 번째 매듭 앞에서 왜 우리 인간은 그토록 나태하고 유약한 존재가 되어 있는가. 그냥 무한히 연속되는 시간 속에서 남아 있는 일에 전념하면 되는 것이다.

11월은 더 사랑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달이다. 찬바람이 밀려오면 모든 것은 옷깃을 여미고 추위와 마주선다. 나보다 더 열약한 사람이 담벼락 아래서 웅크리고 있다. 이 추운 밤을 녹일 수 있는 것은 당신의 작은 사랑이다. 찬바람이 부는 11월에는 가난에, 질병에,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한층 더 추위에 떨어야 한다. 그들의 굳어가는 어깨를 감싸주어야 하는 달이 11월이다. 몰아치는 칼바람은 당신처럼 두꺼운 옷을 입은 자에게만 밀려오는 것이 아니다. 깁(紗)으로 상처 난 몸을 감싸고 추위와 가난에 떨고 있는 이들의 가슴속으로도 무섭게 달려든다. 그들의 헤진 가슴을 가려줄 당신의 손길이 유독 필요한 달, 그 달이 11월이다. 당신의 사랑이 추수 후에 마을을 덮는 저녁연기처럼 포근히 주위를 안아주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정말 11월은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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