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완석 연극평론가·한남대 겸임교수

우리는 영화나 TV드라마 또는 연극무대에서 배우들이 격한 감정에 몰입해 울거나 웃거나 또는 강인한 연기력을 볼 때에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하는 감탄과 함께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사실 알고보면 그러한 연기에 몰입하는 연기방법이 있다. 그것을 ‘연기론’이라고 하는데 전문연기학원이나 대학의 연기관련 학과에서는 이 연기론이 필수과목이다.

이 연기론에는 ‘스타니스라브스키 연기법’이 있고 ‘브레히트 연기법’이 있다. 모두 사실주의적 연기를 목적하고 있지만 그 표현 방식이 전혀 다르다. 즉 ‘스타니스라브스키 연기법’은 감성적이고 ‘브레히트 연기법’은 이성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감성적이라고 함은 배우가 그 맡은 역할과 동일시 해 배우 자신의 존재는 없고 역할에 따라 감정을 몰입하는 방식이다. 반면 이성적이라 하면 자신이 맡은 역할과 유사한 주변인물을 찾아내어 그 몸짓 그 언어를 그대로 답습해 생생하게 표현해 내는 방식이다. 달리 표현하면 ‘스타니스라브스키 연기법’은 자기 내면 속으로 부터 감성을 창출해내는 ‘창조적 유형’이고 ‘브레히트 연기법’은 이성적인 관찰 속에서 상황을 베껴내는 ‘모방적 유형’인 것이다.

그런데 이 두가지 연기법은 어느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배우 자신에 선택의 몫일 뿐이다. ‘창조적 감성’과 ‘모방적 이성’ 우리의 삶 속에서도 어쩌면 배우들의 연기를 위한 목적과 같이 보다 나은 일상을 이루기 위해 적절히 선택해야할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요즈음 하루의 일상을 뒤돌아보면 너무 감성이 고갈된 느낌이 든다. ‘사랑한다’는 말 ‘사랑스럽다’는 느낌, 이 모든 것에 나이를 핑게대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에 익숙치 못하다. 남일 수 있는 이웃들에게는 그렇다 치더라도 함께 사는 아내나 성년이된 자식들에게 조차 그런 표현에 인색하다. 그러면서도 정작 내 주변에서 보여지는 감성적이지 못한 것들에 대해선 아주 비판적이다.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특히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요즘 ‘나는 뉴스를 안본다’는 친구들의 말에 ‘나도 보게 되면 보고 안보면 말고‘라고 답한다. 이 모두 우리가 살고있는 이 사회에 대한 무관심 아닌가!

양극화된 사회, ‘보수’와 ‘진보’ ‘생산자’와 ‘근로자’, ‘여’, ‘야’, ‘갑’, ‘을’. 문화 콘텐츠라는 미명하에 ‘아이돌 열풍’을 선동시키고 십대 청소년인 그들의 얼굴에 짙은 화장과 피어싱을 주렁주렁 달게하고 몸 곳곳에 문신을 하고 하체실종이라는 말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모방하는 청소년들의 비행적 문화에 대해 도덕적 비난으로 사회 이슈화시키는 행태들은 무엇인가? 요즈음은 어떤 상황이나 결과를 두고도 당위성만 인정되면 무죄가 되는 세상이다.

그런데 오늘 가을바람이 스쳐가는데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는 너는? 배우들이 자기 도덕적 가치관과 다르다고 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포기한다면 배우라 할 수 있는가? 만약 내가 주인공이 돼 이런 사회를 정화시키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면 나는 어떤 감성과 어떤 이성적 선택으로서 모두에게 박수갈채를 받아내는 그런 배우가 될 수 있을까? 늘상 어제의 삶을 오늘 답습하고 내일 또한 그렇게 되지 싶은 모방적인 일상을 당연시 하고 있는 나! ‘창조적 감성’은 젊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물론 생산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모방적인 이성’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나는 나의 삶에 감성지수를 회복하기 위해서 은행잎이 떨어져 나부끼는 낙엽진 거리를 걸어보아야겠다. 아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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