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공섭 대전문화원 연합회장

오랜 세월 잘 숙성돼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 좁은 골목길에 하하 호호 웃음이 넘치며 된장찌개 구수한 내움이 담 넘어 풀풀해도 행복 바이러스가 넘치는 달동네, 그곳의 속살을 들여다보며 진한 향을 음미해 보고자 한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는 어떻게 살았을까? 지게와 낫 그리고 고무신이 전부였던 빈곤의 나라. 국민소득 60달러, 그 고난의 시대에 우리의 삶은 어떠했을까? 아, 그 땐 그랬었지. 반세기 전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추억’은 그리 많지 않다. ‘역사와 추억을 함께 만날 수 있는 곳’ 대동산1번지 달동네가 그 추억의 여운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으며 고소한 이야기가 진동하는 곳이다.

우리의 달동네가 현재에 이르게 된 시대적 배경은 근대사와 맥을 같이한다. 빈민층의 주거지역으로 달동네가 태생되게 된 이면에는 1960년대 이후 기간산업이 발달하면서 공업화가 이루어지고 수출이 증가 되면서 대규모의 이농(離農)현상도 달동네를 형성하는데 큰 목을 했다.

그리고 달동네에 처음 둥지를 튼 사람들은 민족상잔의 가슴 아픈 육이오 동란으로 남북이 분단되면서 월남한 피난민들이 거주지를 도시의 산비탈 등 음지에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달동네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방에 누어있으면 수많은 은하수 우수수 떨어져서 작은 마당 텃밭에 한줌 사랑을 뿌리는 달동네, 휘영청 밝은 달을 따다 장대에 가로등 만들어 걸고 반짝 반짝 빛나는 별을 따다 황토벽 벽지 바르고 부엉이 부엉부엉 울어대면 호롱불 밝히고 화롯불에 고구마 구어 먹으며 달달한 이야기꽃이 피어나던 곳, 정겨움이 찢긴 창호지 문틈으로 삐죽이 고개 내미는 고소한 곳 이곳이 달동네의 정서다.

대전 동구 자양초등학교 건너편 골목으로 들어서면서 산동네의 내움이 진동을 하며 길손을 마중한다. 달동네 골목길은 복지관 길을 뼈대삼아 사다리 모양으로 이리저리 얽혀 있으며 골목 대부분은 어른 한사람이 지나가기 버거울 정도로 좁은데다 가파르기까지 하다.

골목길을 오르다보면 건강한 젊은이들도 쉬어가며 올라가야 할 정도며 계단에 앉아 숨을 고르는 노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인 집들이 대부분이며 그나마 이것저것 고쳐 살면서 지금처럼 됐다고 한다.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동네가 언제 헐리려나, 조마조마하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가진 돈 한 푼 없고 빽도 능력도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나가라면 나가야지 무순 방법이 있나, 길거리에 나앉는 수밖에, 그래도 지금은 우릴 쫓아내지 않는다고 하니 다행”이라고 하며 한숨 놓는다.

달동네 오름길을 걷다보면 골목 전체가 노란색으로 칠해진 곳, 벽에는 파스텔톤의 꽃 그림이 수놓아져 있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귀여운 얼굴을 내놓고 있는 아이 그림, 골목 양쪽 벽에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사이좋게 노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달동네 골목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인 것 같다.

달동네 골목 골목길을 걷다보면 각종 해학적 벽화와 조형물을 감상하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낮은 스레이트 지붕위에 빨간고추, 백발의 할머니는 햇볕 잘 드는 공터에 앉아 해 바라기를 한창하고, 길섶에는 분홍색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는 달동네. 이 모든 것들이 골목길의 낡은 풍경과 잘 어울려서 묘한 감흥을 자아내게 하는 곳이 대동 산1번지 달동네다.

달동네는 지금 변신중이다. 동구청에서 추진하는 관광동구를 위한 달동네 하늘공원이 재정비되고 연애바위 길도 추억의 길로 멋지게 단장할 것이며, 달동네에 공원사업을 추진해 통영 동피랑보다 더 유명한 달동네가 될 것이다. 달동네는 역사와 추억을 오롯이 간직한 소중한 우리의 자연유산이다. 불도저나 굴삭기의 소음은 영원이 들리지 않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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