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의 두보(杜甫)가 연래의 희망이 성취돼 우위솔부 주조참군이란 희망이 성취돼 앞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 했을 때 돌연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다.

안록산은 북동방의 절도사로서 十八만이 넘는 병력을 쥐고 지금의 북경에 가까운 범양(范陽)에 있었다. 현종 황제의 좌우에 있는 불충한 신하를 토벌 합네 칭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755년 11월의 일이다. 파죽지세로 남하한 그는 동도(東都)인 낙양(洛陽)을 정월에 함락시키고 대연황제(大燕皇帝)라 칭했다.

그 해 5월, 장안(長安)도 위기에 빠져 현종 황제를 비롯한 장안에서 사는 관리나 귀족 들은 도읍에서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두보 역시 처자가 있는 장안의 동북방인 두메산골로 목숨을 걸고 탈주했다. 그 시골도 안전 하지 못해 다시 더 깊은 강촌(羌村)이라는 시골로 처자를 소개시킨 두보는 현종의 태자로 서방의 영무(靈武)라는 시골구석에서 즉위한 숙종(肅宗)의 조정으로 참내(參內)하려고 출발했으나 곧 적병의 손에 잡혀 죄수로서 장안으로 송치되고 말았다.

두보(杜甫)는 이렇게 잡힌 몸이 됐으나 다행히도 그의 벼슬은 그리 높지 않았고 또 백발이 성성한 약한 노인이었으므로 두보는 남달리 조로(早老)했다. 목숨의 위험을 면했을 뿐 아니라 감시도 비교적 너그러웠다. 두보는 병화(兵禍)를 입어 불 품 없이 황폐해진 도읍의 모습을 몸소 체험할 수가 있었다.

국산파하재(國土山河在) 그것은 도읍지(서울)의 건물이 파괴 됐다던가 당실(堂室)이 안록산에게 패했다는 그것만이 아니고 나라가 깨지고 질서도 파괴되고 기구(機構)도 엉망이 돼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란 전혀 없어지고 말았다.

안록산의 난을 그 후 사사명(史思明) 부자(父子)의 난이 돼 뒤를 끌었고 완전히 끝이 나기까지는 9년이 걸렸다. 더구나 당시로서는 세계 제일의 대 국가였던 당나라는 이 난으로 극성기의 질서와 위력을 회복할 실력을 잃고, 무인(武人)이 할거해 그냥 질질 침체해 버리고 만다. 즉 당조(唐朝)의 기반은 이 때 깨져 버리고 만 것이다. 두보는 춘망(春望) 전편에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라는 시구를 남겼다. <국전서예초대작가·서실운영·前대전둔산초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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