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 대전사무소] 이야기로 풀어보는 인권위 결정례

“엄마! 이 거.”

“뭔데?”

인권희 씨는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이 내민 종이를 건네받았다. 가정통신문이었다. 학예발표회 안내, 학교 소식, 그리고 다음 학년도 학교교육과정 수립을 위한 온라인 설문조사 안내가 있었다. 인권희 씨는 그날 저녁 집안일을 마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온라인 설문조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설문 문항을 하나하나 체크 하던 인권희씨는 10번 문항에서 잠시 손을 멈췄다. ‘우리 학교에서 학생 번호는 어떻게 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는 질문이었다.

“오름아! 너네 출석번호 남학생은 1번부터, 여학생은 51번부터 시작해?”

인권희 씨는 소파에 드러누워 만화책을 읽고 있는 아이에게 물었다.

“응.”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뭐야? 아직도 이런 방식으로 출석번호를 정하고 있단 말야?’

인권희 씨는 자신의 아이가 아들인 데다 성이 강 씨라서, 학교에서 남녀를 구분해 출석번호를 정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알고 있었더라도 자신이 학교 다닐 때 그랬던 것처럼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출석번호 부여 방식에 대한 질문을 눈앞에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출석번호를 정할 때 남녀를 구분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그런 방식은 성별에 따른 차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권희 씨는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가나다순으로 번호를 정한다’는 항목에 체크했다. 

일주일 후 인권희 씨는 설문조사 결과를 안내하는 가정통신문을 받아보았다. 인권희 씨는 다른 항목을 보기 전에 출석번호 부여방식에 대한 결과를 먼저 찾아보았다. 결과는 인권희 씨의 기대와 달랐다. 전체 평균이 가장 높았던 항목인 ‘남녀를 구분해서 남학생은 1번부터 가나다순으로, 여학생은 51번부터 가나다순으로 정한다’는 방식이 채택된 것이다.

“강오름! 너 지난 번 설문조사할 때 출석번호 정하기, 몇 번에 답했어?” 

“1번이라고 했지. 남녀 구분 없이 하는 거.”

“왜?”

인권희 씨는 아이가 성평등 의식에서 그렇게 답했을 거라는 기대를 하며 물었다.

“어차피 나는 강씨라서 어떻게 해도 1번일 거거든.”

“뭐야?”

인권희씨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그러면서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아이처럼, 남녀를 구분하는 출석번호 부여 방식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인권희 씨 아이가 다니는 학교와 달리 이미 많은 학교에서 남녀 구별 없이 가나다순으로 출석번호를 매겨오고 있다. 2005년 인권위가 성별을 기준으로 출석번호를 부여하는 것은 차별행위라고 판단하였고, 이후 서울시교육청을 비롯하여 다른 교육청에서도 출석번호를 부여할 때 성차별적인 요소를 없애도록 권고해 왔기 때문이다.

남학생에게 앞 번호를, 여학생에게 뒷 번호를 부여하는 식의 출석번호 매기기는 성차별적 관행이다. 이러한 방식은 자칫 어린 아이들에게 남성이 여성보다 먼저라는 생각을 갖게 할 수 있고, 남녀 간에 선?후가 있다는 차별의식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어서다. 물론 출석번호 매기는 방식을 정하기 위해 교사, 학부모, 학생(4~6학년) 등 학교 공동체 구성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거쳤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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