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불 60주년… 고암 이응노는
세계적 명성 쌓아가던 중 1967년 동백림사건 2년반 옥고
이후 파리동양미술학교 설립 유럽 한국화 보급 교두보 역할

▲ 고암 이응노
고암 이응노(1904~1984·사진) 화백은 충남 홍성 출신으로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 입선으로 미술계에 등단한다.

이후 자신만의 독자적 화법을 구사하기 시작하며 1935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하지만 10년 뒤 서울로 돌아와 일본 미술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 고유의 한국화를 강조하는 ‘단구미술원’을 조직한다.

후학 양성에 집중하던 그는 1958년 세계미술평론가협회 프랑스 지부장의 초청을 받아 54세 중년의 나이로 파리행을 결심한다. 서양미술의 중심지에서 동양화가인 고암이 전시를 연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선 큰 화제였다. 고암은 당시 모든 예술가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폴 파케티 화랑(Galerie Paul Facchetti)에서 초대전을 열고 전속 작가 계약을 맺으며 파리 화단에 성공적으로 안착한다. 당시 그는 붓과 물감 대신 손을 사용해 잡지를 찢어 붙이고 다시 칼로 긁어내는 등 독창성을 인정받게 된다.

세계적 명성을 쌓아가던 고암은 1967년 대규모 공안사건인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2년 반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의 창작열정은 감옥에서도 이어지며 간장과 된장을 재료로 사용하거나 화장지에 데생을 하는 등 300여점에 이르는 주옥같은 옥중화를 남겼다.

이후 세르누쉬 파리시립동양미술관 내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해 한국작가로 유일하게 유럽인들에게 한국화와 서예를 교육했다.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유럽인들에게 고암은 한국화를 보급하는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70년대엔 한글과 한자가 가진 추상적 패턴에 주목하고 기호화된 형태로 인간 형상을 녹이게 된다. 이 시기 마치 살아 숨쉬는 인간과 같은 기운을 느끼게 하는 고암의 ‘군상 시리즈’는 그의 예술정신이 집약된 고암 예술의 ‘대미’로 꼽힌다.

최윤서 기자 cys@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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