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칼럼] 
정관성 대전복지재단 대표이사

한반도가 더위로 몸살을 앓았던 지난 여름이 언제였나 싶게 찬바람이 아침저녁으로 서늘하다. 다시 가을 추수를 목전에 두고 한가위를 맞으며 도란도란 부모형제가 한자리에 둘러앉을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고단한 삶에서 가족은 얼마나 든든한 울타리이며 기댈 수 있는 곳인가.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공감하고 어려운 일은 힘껏 돕는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가족’끼리 만큼은 철저히 결속돼 있다. 그러나 내 가족 이외의 삶에는 기실 별 관심이 없다. 먹고 살기 바빠 먼 타자의 고통에 대해선 공감할 여력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범위는 나를 둘러싼 가족과 친구, 딱 여기까지란 말인가?

얼마 전 ‘궁중족발 사태’를 보면서 저자는 제레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를 떠올렸다. 건물주의 갑질과 국민참여재판으로 특수상해 등의 혐의만 인정한 배심원의 판결에 대한 여론이 갑론을박 다양했던 사건이다. 공정한 법률적 조치가 우선이냐 아니면 사회적 환경이 우선이냐는 논란이 들끓고 있는 상황에서 저자는 ‘공감’의 부분을 살펴보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학자인 제레미 리프킨은 ‘공감의 시대’에서 인류를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공감은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의 정서적 상태로 들어가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인 것처럼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것은 본능적으로 상호유대감을 추구하며 문화와 역사를 확장해 나아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물질적 이익이 우선시되는 현대사회에서 애정과 우정, 그리고 소속감이 어우러진 공감능력은 나만 살겠다는 자기주의에 밀려 희석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때문에 제레미 리프킨은 작금의 현실에 대해 이제는 ‘새로운 세계관에 눈떠야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한계가 있어서 사회 전체의 삶의 질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소유에서 접속’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사회가 지속 가능한 삶의 질을 중시하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민간 차원의 공동체 참여와 개인이 낸 세금을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복지를 증진시킬 수 있도록 사용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소유한 것들은 나 한사람의 노력만으로 얻어진 것이 아닌 사회 구성원 상호간의 교류와 협력 안에서 파생된 것들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한정된 자원 안에서 더 많이 갖게 된 사람은 덜 갖고 있는 사람과 기꺼이 나누고 고통을 분담하는 사회적 배려와 공감이 필요하다. 만약 이런 배려와 공감이 우선 되었더라면 아마도 서촌서 일어난 궁중족발과 같은 일은 애당초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난 달 말 대전시는 시민이 주인이 돼 시민의 힘으로 새로운 대전을 함께 만들어 가자는 의미로 ‘새로운 대전, 시민의 힘으로’라는 민선 7기의 시정구호를 제시했다. 대전이 어려운 이웃의 든든한 울타리가 돼 주는 시민 공동체의 따뜻한 공감과 배려가 넉넉한 지역이 됐으면 좋겠다. 사회가 이미 혼돈과 무질서의 상태가 되었을 때 그 벼랑 끝에서 후회하기 보다는 다가오는 추석 명절부터 잊혀져가는 ‘공감능력’을 가족과 함께 이웃과 함께 키워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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