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사)대한민국역사문화원장

충북 진천 생가지에 건립 추진 중인 이상설선생기념관의 조기 착공과 역사적인 개관을 기대하는 국민들의 염원이 높다. 적어도 내년 3·1운동 100주년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에는 착공식이 거행되기를 기대한다.

이상설 선생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안중근, 안창호, 김구 등 기라성 같은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으뜸이 되는 지도자이시다. 선생은 독립운동가 중에 드물게 대한제국 의정부 참찬(정2품)의 현 차관급에 해당하는 고위직 출신으로 위상이 있으셨고, 일찍이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반대운동, 을사조약 반대운동 등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섰다.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 같이 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국권회복의 새 길을 제시하셨다. 1907년 광무(고종)황제의 비밀사명을 받아 특사단의 대표인 정사로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국제무대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국제외교활동을 펼치셨다.

그 후 각국을 순방하며 고위 지도자들을 만나 을사조약 무효와 국권회복을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또한 미국에서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샌프란시스코 중심의 공립협회를 통합하여 국민회를 조직하고(1909), 전 세계 한인 독립운동 세력을 연결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였으며, 1910년 연해주에서 13도 의군 편성과 국내진공작전 추진, 일제의 병합에 항의하는 성명회 선언, 권업회 조직, 1914년 연해주에서 망명정부로서 대한광복군정부 수립(정통령 이상설)과 광복군을 조직하여 조국 해방의 대대적인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이 회심의 대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국이 되어 우리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그 후에도 다시 신한혁명당 조직과 광무(고종)황제의 북경 망명계획을 통해 독립운동의 일대 반전을 추진하다 일제에 탐지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이와 같이 이상설 선생은 독립운동사에 획을 그을 만한 국제적 스케일과 대담한 전략으로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좀 더 오래 살아계셨더라면 3·1운동 이후 독립운동 각 세력의 구심점이 되어 독립운동을 이끌어 가셨을 인물이었다. 그러나 보재선생은 광복이 되기 28년 전 너무 일찍 돌아가셨고, 돌아가시면서 유품과 저술 등 모든 것을 태우라는 유언 때문에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국민들에게 많이 잊혀진 독립운동가가 된 감이 있었다.

그 때문에라도 보재선생을 위한 기념관은 진작 건립되었어야 할 사업이었다. 기념관 건립사업은 2017년 서거 100주년 건립 목표로 2년 앞둔 2015년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해 국회를 통해 건립예산 중 국고 지원 26억 원과 도비 및 군비를 확보하여 건립에 탄력을 받았다. 건립 예산은 자부담금을 합하여 총 87억7000만원이었다. 현재 생가와 사당인 숭렬사가 있는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134-2번지(이상설 안길 10) 일원에 부지가 마련되었고, 건축허가와 기념관 설계 작업까지 모두 완료되었다.

이상설선생기념관 건립은 이제 올 10월 착공식을 남겨두고 있는데, 한 가지 난관에 부딪혀 있다. 건립예산 중 자부담금 17억5000여만원이 확보되어야 착공에 들어갈 수 있는 모양이다. 자부담금은 이 사업이 전 국민의 참여와 정성으로 건립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책정된 것이었다. 진천군민, 종중과 후원회, 경주이씨중앙화수회가 기금조성을 위해 노력해 오고 있다. 이제 1인, 1만원, 1구좌 범국민참여운동도 요청된다.

독립기념관이 국민성금으로 건립되었듯이, 이상설선생기념관도 국민 참여에 의해 착공에 이르게 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는 날을 기대한다.

그렇게 되면 국민들의 자부심과 나라사랑의 정신이 더욱 빛나게 될 것이며, 내년 3·1운동 100주년의 해에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사업이 완성되어 국민들 앞에 다시 선보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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