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아버지·삼촌 한(恨) 달랬습니다”

2박 3일 한없이 짧기만해, 얼굴형 닮아 순간 알아봐
온종일 집안 이야기 나눠, “오랜 시간 함께 있고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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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4일 금강산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 2차 행사에서 찍은 기념사진. 오른쪽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성순태, 성근제, 성명제, 성익순, 성명희 씨. 성순태 씨 제공
“언제 다시 만날 지 모르는데 2박 3일의 시간은 짧기만 했습니다. 아버지와 삼촌, 서로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오랜 시간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고(故) 성백래·성백수 씨 형제는 남북분단으로 살아 생전 두 번 다시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눌 순 없었다.

이들의 한(恨)과 서로를 향한 그리움은 두 사람의 아들이 만남으로써 대신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

충북 영동 출신인 성순태(66) 씨와 그의 사촌들(성명제·성익순·성명희 씨)은 북측의 그리운 가족을 만날 남측 이산가족 2차 상봉단으로 포함 돼 지난 달 24일 북에 있는 사촌 형 성근제(73) 씨를 금강산에서 만났다.

성순태 씨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사촌 형이었지만 얼굴형이 같아서 그런지 만나는 순간 묘하게 알아봤다”며 “함께 간 사촌들 역시 사진 속 할아버지 얼굴과 똑같이 생긴 사촌 형을 보고 모두 놀랬다”며 첫 만남의 순간을 기억했다.

소위 ‘지식인’이었던 삼촌 고(故) 성백수 씨는 광복 직후 사회주의 체제를 동경해 1947년 자신의 가족과 함께 월북했고, 두 번 다시 가족과 만날 수 없었다.

성 씨의 아버지 성백래 씨와 그의 삼촌은 집안의 셋째·넷째 아들로, 집안 여느 형제보다 우애가 돈독했다고 한다.

성 씨는 “아버지는 항상 ‘영화감독인 백수 삼촌은 아버지 형제·자매 중 가장 똑똑하고 총명해 가족 중 가장 많은 교육을 받아 집안에 큰 자랑이었다’고 내게 말하곤 했다”며 “아버지와 집안 어른들이 모이는 자리면 어김없이 삼촌이야기가 나왔고 가족 모두가 그리워했다”며 삼촌에 대한 기억을 회상했다.

성 씨의 아버지는 동생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안은 채 숨을 거뒀고, 성 씨는 가족과 자신의 삶을 이어오기 위해 매일을 정신없이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달 초 성씨는 북에서 자신과 사촌을 찾는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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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으로 간 고(故) 성백수 씨 결혼식 사진. 성순태 씨 제공
그는 “8월 초 북측에서 남측가족을 찾는다고 처음 연락이 왔을 때 어떡해야 할지 몰랐다”며 “항상 가족, 사촌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만, 막상 연락이 오니 혼자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었기에 가족들과 다 함께 협의했다”고 말했다.

이어 “회의 중 문득 가족과 뿌리를 향한 그리운 마음은 남이고 북이고 한마음 일 것이라는 생각에 가족 모두와 함께 만남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후 그와 가족들은 북에 있는 사촌 형에게 건넬 작은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고민했다.

고향의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게 고향 정경 사진과 할아버지 산소 사진을 비롯해 추운 북한 날씨를 고려한 다양한 방한복들, 북에서 맛보기 어려운 주전부리와 생활용품을 준비해 갔다. 그렇게 가져간 짐만 다섯 보따리다.

성 씨는 “무엇을 준비해 가도 (사촌 형이) 기쁘게 받겠지만 대충 고를 순 없었다. 혼자 다 사용하지 못하더라도 가족과 친구 등과 함께 쓸 수 있게 많은 물품을 준비해 갔다”고 말했다.

이번 이산가족상봉 행사에서 무슨 대화를 나눴냐는 질문에 그는 “만나서 별의별 이야기를 다 나눴다”며 “하루는 온종일 할아버지와 아버지 등 집안 이야기를 나눴고 또 자식 이야기와 먹고 사는 일상적인 대화만으로 하루를 다 보내기도 했다”고 답했다.

이어 “아무리 이야기해도 끝나지 않았고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았는지 몰랐다”고 덧붙였다.

성 씨는 “언제 우리가 다시 북에 있는 가족을 만날지, 북측 가족들은 언제 다시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니겠냐”고 회한에 섞인 말을 남겼다.

진재석 기자 luck@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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