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 진양호반의 남인수 동상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 소리//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하건만/ 못생긴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애타는 숨결마저 싸늘하구나// (……)

이부풍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가 부른 이 '애수의 소야곡'은 1937년 오케이 레코드에서 SP로 발매되었다. 이 노래로 남인수는 인기정상의 길로 접어든다. 비슷비슷한 표현이 이어지는 감상일변도 가사지만 차분한 성찰속에 욕망이나 집착과 결별하고 자신의 삶과 세상을 직시하는 노랫말은 8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운을 준다. 애수의 소야곡을 비롯하여 낙화유수, 감격시대, 가거라 삼팔선, 이별의 부산 정거장, 산유화, 청춘고백, 무너진 사랑탑 등 1000여곡을 부른 남인수 가수는 올해로 출생 100년을 맞는다.

그동안 우리 가요의 변천사는 사회와 의식, 감성이 바뀌어 온 흔적을 증거한다. 별다른 학력이나 음악수업 없이 오로지 타고난 목소리 하나로, 그리 길지 않은 활동을 통하여 남인수는 한국가요사의 전설이 되었다. 넓은 음역에 풍부한 감성으로 몇 분짜리 노래 한 곡에 자신의 감정과 열정을 쏟아붓는 혼신의 노력으로 그는 '가요황제'라는 칭호를 얻었다. 44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목소리가 주는 독특한 느낌과 반향은 사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새롭다. 일제강점기 말엽 친일성향 가요를 부른 탓에 친일파로 분류된 것이 천재가수의 걸출한 노래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1961년 가수협회 회장, 1962년 1월 사단법인 한국연예인협회 초대 부이사장으로 선출되었지만 그해 7월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양한 춤과 노래, 비주얼 효과로 세계와 호흡하는 이즈음 K-POP의 활약을 보며 열악한 환경에서 오로지 가창력 하나로 우리 가요의 토대를 쌓은 그 시절 가수들이 당시 사회와 국민감성에 끼친 영향력도 본격적으로 조명될 때가 아닌가 싶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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