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흥위위보승별장 지낸 안자미 시조, 안향 이후 부흥…11대 걸쳐 과거 급제
검소한 생활과 선정…애민정신 높이 평가, 안중근·안창호 대표적 인물…후세 귀감

▲ 논산시 관촉동 반야산에 소재한 안향 선생 동상. 논산 김흥준 기자
순흥 안씨 선조들은 높은 학문과 식견으로 나라에 충성을 다해 왔고 충절(忠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인물들이 많다. 특히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검소한 생활과 선정(善政)을 베풀어 양반이 지배하던 당시 계급사회에서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으로 백성과 더불어 살며 청렴하게 살았다. 이에 따라 순흥안씨가 역사적인 측면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본지에서는 후손들에게 뿌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물론 충효사상과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순흥 안씨의 시조와 지명유래, 순흥안씨를 빛낸 인물들에 대해 알아봤다.

◆순흥 안씨의 지명유래

순흥 안씨(順興 安氏)는 한국의 성씨 중 하나이다. 시조는 안자미(安子美). 가문이 성립됐을 당시에는 흥녕 안씨(興寧安氏)로 불렸는데, 순흥 안씨가 생겨난 고려시대 중후반기에는 순흥이라는 지명이 아직 없었고 흥주(興州) 혹은 흥녕(興寧)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순흥 안씨는 경상북도 영주시 소백산 기슭의 순흥면에 본관을 둔 안씨를 말한다. 순흥이라는 지명은 조선 초기 설치된 순흥도호부에서 유래됐다. 대체로 순흥을 위시로 한 경상북도, 전라북도, 충청남도, 강원도, 황해도 등에 거주 비율이 높다.

순흥 안씨는 토족 성씨로 고려 신종 때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지내고 신호위상호군에 추봉된 안자미를 시조로 한다. 시조 안자미는 영유·영린·영화 등 3형제를 뒀다. 이들 후손들이 각각 1파 추밀공파(樞密公派), 2파 별장공파(別將公派), 3파 교서공파(校書公派)로 나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또 이들 3파에서 안영유의 후손으로 14개 파, 안영린의 후손으로 4개 파, 안영화의 후손으로 4개 파가 있다.

▲ 논산시 벌곡면 조동리에 소재한 추원재. 논산 김흥준 기자
◆조선시대 과거급제자 안향(安珦)등 641명

순흥 안씨는 시조 안자미의 증손인 안향 이후 크게 일어나 11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하고 20명이 봉군(封君)됐으며, 17명에 달하는 문형(대제학)을 배출했다. 그래서 조선조에서는 김, 이, 박씨 등과 함께 6대 성씨중의 하나로 인정받았다. 11대에 걸쳐 과거급제를 한 사람은 안향(安珦)-안우기(安于器)-안목(安牧)-안원숭(安元崇)-안원(安瑗)-안종약(安從約)-안구(安玖)-안지귀(安知歸)-안호(安瑚)-안처선(安處善)-안정(安珽)이 그들이다. 또 6세 안축(安軸), 7세 안종원, 8세 안경공, 9세 안순(安純), 10세 안숭선(安崇善) 등 5대에 걸쳐 대제학을 지내기도 했다.

1파인 추밀공파 순흥 안씨는 시조의 증손인 안향이 크게 현달하여 가문이 번창했다. 안향은 경기 부곡에 '안자묘'(安子廟)가 있을 정도로 한국 주자학의 태두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아들 안우기(安于器)는 찬성(贊成)을 지냈고, 손자 안목(安牧)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제2파인 별장공파 순흥 안씨는 안영린의 후손으로 안문개(安文凱)가 유명하다. 그는 충숙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충절을 바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됐으며, 첨의참리가 되고 순흥부원군이라는 호를 받았다. 충혜왕 때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송천봉(宋天鳳) 등 33인과 함께 옥대(玉帶)를 하사받았다. 3파인 교서공파 순흥 안씨는 안영화의 후손으로 충숙왕 때 원나라의 제과에 급제한 근재(謹齋) 안축이 유명하다.

순흥 안씨에서 배출된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641명이나 된다. 문과에 121명이며, 무과에 91명, 사마시에 327명, 역과에 42명, 의과에 24명, 음양과에 26명, 율과에 9명, 주학에 1명이다. 최근 국세조사에서 14만 5254가구에 총 46만 882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전체 안씨의 73.5%에 달하는 수치이다. 대한민국의 안씨 중에서는 가장 큰 본관이다.

▲ 안향의 신위를 모신 사당 안자묘(安子廟) 입구에 자리한 안자묘(安子廟) 비석. 논산 김흥준 기자
◆시조 증손 안향(安珦)이후 번성

순흥 안씨는 시조의 증손인 안향 이후 크게 번성했다. 안향은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 한 뒤, 교서랑(校書郞)과 감찰어사(監察御史), 상주판관(尙州判官)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충렬왕 복위 때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고 후진 양성에 진력하여 유학의 학풍을 일으켰다.

안침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전라도 관찰사와 한성부윤, 대사헌, 경상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고 공조판서를 거쳐 지돈령부사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5형제도 모두 현달했다. 안당은 성종 때 친시문과에 급제한 뒤 중종 때 형조·공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으나, 1521년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아들 안처겸이 처형당할 때 사사(賜死)됐다. 안위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경국대전을 찬수하고 호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냈다. 또 안현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명종 때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했고 청백리에 녹선됐다.

안축은 충숙왕 때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 전법판서가 되고, 충목왕 때 첨의찬성사, 춘추관감사가 되어 충렬, 충선, 충숙왕조의 실록을 편찬했다. 안보는 공민왕 때 정당문학, 안즙은 대제학을 지냈는데, 3형제 중 안축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안축의 아들 안종원(安宗源)은 조선 개국 후 삼사영사(三司領事)에 오르고, 안종원의 아들 안경공은 개국공신으로 태종 때 집현전 대제학이 됐다. 하지만 순흥 안씨 집안에 멸문지화가 미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종 복위와 관련된 정축지변이 대표적이다. 또 기묘사화에 이은 신사무옥에서 안당과 그의 아들 안처겸이 처형당했으며, 을사사화 때는 안명세가 참화를 당했다. 또한 안중근, 안명근 사건으로 일제가 순흥 안씨 집안에 가한 탄압도 빼놓을 수 없다.

그중 가장 큰 화는 단종 복위 사건과 관련된 정축지변. 당시 순흥에 유배되어 왔던 금성대군(세조의 동생)이 영월에 유배되어 있는 단종과 연계하여 복위를 꾀하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단종과 금성대군이 죽임을 당하고, 순흥도호부에 세거하고 있던 700명에 달하는 순흥 안씨가 멸문지화를 당하여 전국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논산=김흥준 기자 khj50096@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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