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 ㈜대원 전무이사(수필가)

산길 저 아래 파란 지붕이 보인다. 겉모습은 책방처럼 보이지 않는다. 마치 허름한 창고 같다. 주말 오전이라 그런지 손님은 보이지 않는다. 일층은 내 마음의 다락방처럼 아늑하다. 각목으로 어설프게 짠 비좁은 계단을 내려가니 거기가 진짜 책방이다. 바닥 흙내와 퀴퀴한 곰팡내, 책 내음이 뒤섞여 코를 찌른다. 눈앞에 책장이 끝없이 펼쳐진다.

책장의 미로 속으로 빠져든다. 책장과 책장 사이, 한 사람이 지날 수 있는 통로로 나아간다. 무언가 튀어나올 듯 어둠침침한 공간이다. 시력이 안 좋은 사람은 돋보기를 써야만 책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조도가 낮다. 이곳에서 책을 찾을 수 사람은 딱 한 사람, 주인장뿐일 것 같다. 무엇보다 책방의 현주소를 본 사람들이 헌책을 주문하기나 할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책장을 살피다 왔던 길을 돌아보니 신기한 형상이 시선에 든다. 검은 고양이가 뒷발을 의지하여 서서 앞발은 책을 살피는 모습이다. 마치 책장 높은 곳에 원하는 책을 찾고자 깨금발로 서 있는 딱 그 형상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책을 읽지 않으면, 고양이가 자신을 보란 듯 연출하는가. 주인장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헌책방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책을 사지 않는단다. 그저 책장에 가득 진열된 책의 이미지를 보러 온 사람들이다.

헌책방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손님에게 책방의 이미지를 선사한다. 책이 없던 시절 책이 꽂힌 책장에 대한 그리움의 봇물을 풀어주는가. 새한서점은 끝없이 펼쳐진 기나긴 책장에 나열된 무수한 헌책과 바닥에 무덤처럼 쌓인 책 풍경을 날것으로 보여준다. 문득 이태준의 ‘책’에 관한 구절이 떠오른다. 종이가 없던 시절 얇은 대나무 조각(죽간)에 글을 써 가죽끈으로 묶은 모습이, 바로 冊이다. 상허가 책만은 한자 '冊'으로 쓰고 싶어 한 건, '冊'자에 책의 원초적 특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 '책'보다 '冊'이 더 아름답고 더 冊답다. '冊'은, 읽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어루만지는 것인가? 하면 다 되는 것이 冊이다. -이태준 ‘책’中

우리는 과연 책에 관하여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가. '책은 책일 뿐이다'라고 단순 명쾌하게 말하는 주인장, 그리고 '冊'이란 단어를 고수한 이태준. 그들은 어느 면에서 닮아 있다. 경영난으로 깊은 산속으로 밀려나 나대지에 헌책방을 꾸린 주인의 속마음을 누가 알랴. 자연지형을 살려 책 속에서 얻은 지식과 지혜로 지은 서점이다. 40년 이상을 책과 함께하는 그의 마음과는 다르게, 주말마다 찾아든 수백 명의 손님은 책방의 고유한 의미를 바꾸어 놓는다. 책방에서 책은 뒷전이고, 책방의 이미지만 거저 품고 돌아가니 이를 어쩌랴.

책방 주인은 내가 주문한 천경자 도록을 품고 걸어온다. 내 앞에서 상념을 털어내듯 먼지를 탈탈 털어 책을 건넨다. 그가 처음과 다르게 마음의 경계를 풀고 대화를 이어가나 책방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책방을 뒤로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산길로 걸어 나간다. 부디 헌책방이 잘 견뎌내길 기원할 뿐이다. 자연을 품은 헌책방을 찾는 손님 또한, '인생 샷'이 아닌 '인생 책' 공간이길 바라고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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