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경신 충남교육청 학교정책과장

이제야 답장을 쓰네. 그대의 편지를 보고 잠시 쇼크 상태였어. ‘아나필락시스 쇼크’라는 생소한 용어도 그렇지만 그대의 눈물과 분노가 느껴졌기 때문이야. 아이가 계란을 집은 젓가락을 만진 손으로 눈을 비벼 호흡곤란을 겪었다는 데서는 숨이 멎는 것 같았어. 더 놀란 것은 공립유치원 입학식 날 원장이 ‘이곳에 다니고 싶으면 어떤 일이(사망)이 있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에 공증을 받아오라’는 대목이었지. 숨이 턱에 차는 일상이니 특별 관리할 아이는 생각도 못했을 거라 이해하면서도 속이 상하네.

의무교육은 좀 다르리라는 기대로 시작한 초등학교도 ‘부담스러운 존재’로서의 생활은 별반 다르지 않아서, 부모가 책임지고 도시락을 싸보내라고 했다며?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책임’이라는 말이 이처럼 장애가 되는 시대는 없을거야. 그렇지만 작은 실수도 학교의 책임으로 돌리는 풍토나, 30여명을 한 교실에서 돌봐야 하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겠지. 아이가 소외받을까봐 학교식단과 똑같은 도시락을 싸기 위해 새벽부터 피곤과 싸우는 그대를 생각하니 편지를 쓰는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네.

그대의 양해는 얻었지만 어찌보면 지극히 사사로운 답장을 공개적으로 보내는 이유는 딱 한가지야. 국가와 사회가 함께 책임을 지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방법을 찾자는 것이지. 그동안 여기에 8번 칼럼을 썼지만 내가 필진이라는 것이 이렇게 고마운 적이 없었어. 지난번 그대가 눈물이 그렁그렁하며 ‘제 자식 일이어서만은 아니예요’를 강조할 때 내가 한 말 기억나? 역사가 기억하는 애국자나, 세상을 놀라게 할 많은 발명품, 획기적인 정책들도 이면을 살펴보면 자신이나 가족 때문에 시작된 경우가 많아. 내가 열심히 전기를 끄고, 물과 휴지를 아끼는 것도 인류를 위해서라기보다 보기만 해도 마음에 불이 켜지는 내 손주 때문일거야.

아나필락시스 쇼크로 사망할 수 있다는 것은 그대 아이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어. 조금 교육적으로 말하자면 아나필락시스 쇼크로 인한 사망은 굳이 음식만은 아닐거야. 가혹한 말, 태도, 눈길도 포함되겠지. 사람은 참말 취약한 동물이거든. 어쨌든 부모 혼자 책임지라고 할 수는 없어. 단 한 명의 아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충남교육의 가치라면 무언가를 해 낼 수 있을거야. 차근차근 현황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고, 연수를 하든, 홍보를 하든 위험성을 알리자고. 혹시 알아? 일본 마츠모토 시처럼 대용급식의 길이 열릴지. 아이가 당당하게 살아갈 세상을 위해 정도를 밟으며 최선을 다하다 보면 그대가 충남교육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쓸지도 모르잖아?

유치원부터 상처로 시작한 사회지만 학교교육에서 그 상처를 치료하고 소수와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을 배워 사회로 나갔으면 좋겠다는 그대의 소망이 이루어질 날을 기대하며 함께 갈게. 필요하다고 느끼면 시작은 혼자여도 좋아. 걷다보면 함께 걸을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이 인생길이니까. 좋은 대책이 나올 때까지 조금더 고생해. 삶은 동굴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터널을 지나는 것이니 곧 빛이 보일 거야. 건강 유의하고.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