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예부터 인간들은 무더위를 쫒기 위해 도구를 사용했다. 부채다. 손으로 부채를 좌우로 부치면서 바람을 일으켜 무더위를 식혔다. '부채'는 '부치는 채'의 준말이다. 부채는 재료가 최근 들어 다양해지고 있지만 원시시대에는 나뭇잎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면 커다란 오동 나뭇잎 같은 것 말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대나무로 살을 만들어 넓적하게 벌려서 그 위에 한지 등 종이나 비단 등 헝겊을 바른 부채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옛 선비들은 한 여름 무더위에 옷을 함부로 벗을 수 없고 목욕조차 편하게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렇다고 요즘 같이 선풍기나 에어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때 아주 요긴하게 사용된 것이 바로 부채였다. 그늘에 앉아 부채질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무더위를 쫓아낼 수 있었다. 특히 부채는 과거에 밥을 할 때 파리 쫓기에도 요긴했으며 아궁이 화력을 키우거나 꺼져가는 불씨를 살릴 때도 최고였다.

부채는 얼굴 가리개나 협객의 무기(주로 접는 부채) 등 다양하게 사용되기도 했다. 선비나 풍류객, 화가들은 부채 면에 선시(扇詩)나 산수화 등을 넣기도 했다. 부채에 써준 시 한 수 때문에 유배에서 풀려났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은 1818년 해배(解配)돼 귀가하던 옛 동학(同學) 김이교(金履喬)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조정에 부탁할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잠자코 있는 다산은 지인에게 들고 있는 부채를 잠시 달라고 하더니 그 부채 면에 시 한 수를 써주었다. "대나무 몇 가닥에 새벽달 걸릴 적에 고향이 그리워서 눈물이 줄줄이 맺히오" 지인들은 뭔가 심오한 뜻이 있을 거라 생각했으나 끝내 그 뜻을 파악하지 못했다. 어느 날 그는 일가붙이인 세도가 김조순(金祖淳)을 만났다. 마침 그 부채를 들고 바람을 일으키며 대화를 이어갔다. 순간 김조순의 시선이 부채에 적힌 시에 꽂혔다. 그 뜻을 감지한 그는 정약용의 해배를 장령(掌令: 사헌부 정4품 관직) 이태순(李泰淳)으로 하여금 상소하도록 해 그 청이 받아들여졌다. 부채에 써 준 시 한 수가 18년 동안 유배생활의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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