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변평섭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

1927년, 일제강점기에 한반도 최초로 도요지 발굴조사가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일대에서 이루어 졌다. 발굴유물은 그 자리에서 경매되었으며 얼마정도의 도자유물이 수탈되었는지 모른다. 또 생산시기를 알 수 있는 도편층도 망쳐 놓았다. 이 때 경매로 구입된 나가사키 마쯔우라가의 철화분청사기 자완은 현재 일본의 중요문화재가 되었다. 도굴성격의 발굴조사, 이들은 어떤 이유로 계룡산 도자유적을 파헤쳤을까? 그것은 도자기에서 가장 한국적 정서를 대표하는 것으로 철화분청사기를 꼽는다. 분청사기 7가지 제작기법 중에서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계룡산 철화분청사기를 가장 높게 평가하여 '계룡산'이란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우리의 계룡산 철화분청사기를 평생 반려자로 사랑한 일본인이 있었다. 구로다 로산진(北大路 魯山人·1883-1959). 그는 도예가이면서 요리연구가로 일본의 요리를 예술로 승화시킨 장본인이다. 그가 특별히 초대한 사람에게는 계룡산 철화분청사기에다 음식을 담아 대접할 정도였다. 로산진은 직접 계룡산에 가마를 만들고 흙으로 빚은 분청 찻사발을 만드는 등 열정을 쏟기도 했다. 지금도 그가 빚은 분청 찻 사발이 보존돼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피카소가 일본에 왔을 때도 계룡산 분청사기를 보여주었다.

로산진 뿐 아니라 일본 많은 도예가들이 철화분청사기에 열광했고 특히 계룡산을 분청사기의 메카로 생각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건너가 일본 도자기의 신(神)으로 추앙받는 이삼평 역시 그의 고향 충청도 금강 일원인 계룡산에서 활동했고, 이 일대에 30여개 요지가 확인됐다. 우리 정부가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를 사적 333호로 지정한 것도 그런 역사적 배경이 있다. 정말 마음을 잡아끄는 막걸리색 분장토에 짙은 먹쑥색의 산화철로 그려진 물고기, 새, 초화문(草花紋), 민화… 이렇게 구어진 계룡산 철화분청사기는 조선시대 독특한 양식으로 크게 사랑을 받았다. 그야말로 도자기 예술의 극치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점차 계룡산 분청사기의 영광이 단절되었으며 오히려 일본에서 중요문화재로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물론 국내에서도 도예가와 재료과학자들 사이에서 노력과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분청사기의 역사적 고찰에서부터 복원과정, 그리고 재료 연구 등을 꾸준히 하고 있고 도예작가 이재황 교수를 비롯, 계룡산 인근의 지역 도예가와 연구가들이 창작활동과 함께 현대적 복원작업을 활발하게 전개해 왔다. 특히 최근에는 '골프존 문화재단'에서 많은 비용을 들여 '계룡산철화분청사기'전집을 발행했고, 영문판으로 까지 발간, 주요 국가의 박물관, 미술관을 비롯한 문화기관에 발송한 바 있다.

이런 가운데 철화분청사기에 전념해온 학자, 도예가, 그리고 분청사기를 우리가 자랑하는 문화유산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데 뜻을 잡고 있는 인사들이 모여 '철화분청사기 보존과 발전을 위한 비영리 재단'을 추진하기로 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무엇보다 창의적 산업시대인 21세기에 철화분청사기를 체계적으로 육성 발전시킬 시스템이 마련된다는 것이니 재단 필요성에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재단이 되면 비영리재단인 만큼 도예가들과 연구자들을 위한 체계적 지원이 가능하며 도자기 문화가 활성화되어 관광과 산업화에까지 시너지 효과를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재단이 설립되면 계룡산 분청사기의 콘텐츠와 자산을 해외에 적극 홍보함으로서 계룡산 분청사기가 갖는 역사적 중요성과 이것이 갖는 세계 도자기사의 한 축으로써 당당한 위치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화분청사기의 비영리 재단의 출발은 지역문화발전을 위해서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매우 고무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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