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누가 김부장을 죽였나'

52시간 근무하려면 근면성공 신화부터 깨라

신간 '누가 김부장을 죽였나'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클로프닝(밤늦게 닫았던 매장문을 새벽에 다시 여는 것), 겸배(결원이 생기면 동료 집배원 배달 몫까지 맡는 것), 화출·화차(콜센터 상담원들이 화장실 오갈 때마다 메신저로 보고하는 것), 디졸브(방송화면이 겹치듯 어제 아침과 오늘 아침을 분간 못함), 깔때기 현상(연말이나 월말 업무가 쌓이는 사회복지업계 상황), 따당(서울~부산을 화물차로 하루 만에 왕복 운행), 실적=인격(건수와 실적만을 중시하는 증권가 격언), 공짜 야근, 합법 노비, 월화수목금금금 등.

세계적인 일중독자들(workaholics) 국가인 우리나라의 노동 실태를 대변하는 일터의 은어는 차고 넘친다.

얼마 전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에 들어갔으나 일터에서의 반응은 낙관적이지 않다. 수십 년간 인이 박인 장시간 노동의 문화와 습성이 제도가 바뀐다고 쉽게 변하겠느냐는 것이다.

신간 '누가 김부장을 죽였나'(한빛비즈 펴냄)는 문제가 개발독재 시대처럼 노동을 강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규범, 경쟁·보상체제, 분위기를 통해 자발적으로 일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장시간 노동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여겨 기꺼이 감내하거나, 승진의 발판이라 여겨 오히려 자랑스레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 52시간 근무제와 같은 제도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고려대, 이화여대에서 노동과 여가문화 등을 강의하는 노동전문가 김영선으로 앞서 '잃어버린 10일', '과로 사회', '정상 인간' 등을 펴냈다.

저자는 "장시간 노동이라는 리듬은 오랫동안 반복되면서 우리 몸과 마음에 새겨져 자연스러운 질서 그 자체가 돼 버렸다. … 장시간 노동이라는 악취에 무뎌질 대로 무뎌져 얼마나 고약한 냄새인지 알지 못하는 저인지(低認知)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책에 따르면 우리나라 연평균 근로시간은 2천69시간(201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전체 평균인 1천763시간보다 306시간이나 많다. OECD 평균보다 1년에 한 달 정도 더 일하고 독일보다(1천364시간)보다는 넉 달이나 더 일하는 셈이다.

장시간 노동은 건강문제를 비롯해 관계단절, 소외경험, 우울증, 과로자살, 대형사고 등 갖가지 문제를 낳는다.

뿐만 아니라 장시간 노동은 사회적 '폭력'이다.

장시간 노동은 다른 누군가의 일자리를 불안하게 하거나 빼앗고, 내팽개친 가정을 배우자가 떠맡도록 희생을 강요한다. 또한 값싼 장시간 노동은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 인턴, 현장실습생, 여성과 노인, 이주노동자 등 취약 계층에 고스란히 전가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폭력에 길든 삶을 개선하기는커녕 오히려 폭력을 재생산하는 데 참여한다. 정시 퇴근, 연차 100% 소진, 야근수당 청구 등 시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신입사원을 보면 '개념 없다'고 여기며 조직 문화에 적응해 '철들기'를 바란다.

'개미와 배짱이'와 같은 경제 개발기의 근면 이데올로기는 신자유주의 시대로 불리는 오늘날 근면과 성공을 연결짓는 '근면 신화'로 재탄생해 더욱 강력한 규범으로 작동한다.

이는 근면에 대한 강박을 만들고 헌신을 유도하며, 휴식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장기적인 노동에 순응하게 하고, 어쩌다 야근에 지치고 짜증이 나도 회사에 충성을 다한다는 인상 관리(impression management)를 포기하지 못하게 한다.

이렇게 해서 장시간 노동은 회사와 가정에서 명예의 표식이 되고 우월감의 근거가 된다.

저자는 장시간 노동의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더욱 근본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우선 2~3인분의 업무량을 1인분으로 줄여야 한다. 시간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끔 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도 중요하다.

이밖에 장시간 노동에 스스로 결박하는 소비주의와 거리 두기, 퇴근 후 회사로부터 메일이나 소셜미디어(SNS)를 차단할 수 있는 제도 장치, 그리고 근면신화에 대한 대항담론이 필요하다.

256쪽. 1만5천원.

abullapi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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