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미술관,  9월 30일까지 고암 도불 60주년 국제전 ‘이응노, 낯선 귀향’
학예연구사 마엘 벨렉 초청 프랑스인 관점 재해석… 작품 29점 국내 첫 공개

▲ 이응노 화백. 연합뉴스
프랑스인의 관점에서 본 이응노의 예술세계를 해석하는 의미 있는 전시가 대전에서 열린다. 이응노미술관은 지난 13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오는 9월 30일까지 고암 이응노 도불 60주년 기념 국제전 ‘이응노, 낯선 귀향’을 개최한다.

지난해 이응노는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손꼽히는 퐁피두센터(Pompidou Center)의 ‘Donation Lee Ungno’展을 비롯해 세르누쉬 파리시립동양미술관의 ‘L'homme des foules(군상의 남자)’展을 연속으로 히트시키며 현대미술사에 자랑스러운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와 함께 세르누쉬 미술관과는 2013년부터 업무협약을 체결해 활발히 교류해온 바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작년 세르누쉬 미술관의 기획자인 학예연구사 마엘 벨렉(Mael Bellec)을 초청해 프랑스인의 관점에서 본 이응노의 예술세계를 해석한다.

특히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적 없었던 프랑스 세르누쉬 미술관과 퐁피두 센터의 이응노 소장 작품 29점이 국내 최초로 관람객들을 만나게 된다.

이응노의 작품들은 전통 문인화와 서예, 일본의 니홍가, 파리 화단의 앵포르멜 추상 미술 등 문화적·시대적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이번 국제전을 통해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이응노의 복합적, 다층적인 작품세계를 부각시켜 그 독자성과 가치를 관람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이응노, 구성, 1966, 종이에 수묵, 132.8×69.8 cm, 세르누쉬 미술관 소장(업로드).jpg
▲ ▲ 이응노,구성,1966,종이에수묵

◆제1전시 : 영감

이번 전시는 총 다섯 개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이응노가 작가로서의 여정에서 발견한 복합적 시각 어휘들(니홍가, 한국 민속 예술, 전통적 문인화, 서양의 동시대 미술, 라틴 아메리카 미술, 서예 등)로부터 길러 올린 ‘영감’이 어떻게 표현됐는지 알 수 있다.

이응노는 구한말 조선 왕조의 백성으로 태어나 일제 강점기를 지냈고, 이어 독립 국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됐다가 말년에는 프랑스로 귀화하는 생애를 보냈다. 그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을 포함한 유럽 전역을 두루 여행하며 회화, 콜라주, 조각 작품들을 전시했다. 바쁜 일생 동안 그는 많은 다양한 미술 양식들, 영감의 원천들과 조우했고, 이들을 수용해 독창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작품에 녹여냈다.

그의 초기 과업 중 하나는 동양화가들의 기법을 습득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의 문인화 뿐만 아니라 민속화의 어휘들에 통달하는 법을 배웠다. 그 후 일본 ‘니홍가(메이지 시대 일본화풍의 회화)’와 ‘신난가(다이쇼 시대 남종화를 새롭게 해석한 회화)’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회화 기법들은 수십 년이 넘는 그의 활동기 내내 많은 작품의 근간을 이뤘다.

일본의 식민 지배가 종결된 후, 이응노는 한국의 삶에 깊이 뿌리를 둔 새로운 시각 어휘들을 창조하는 데 전념했다.

하지만 프랑스와 미국 미술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기 시작하면서 그의 창작욕은 서서히 추상주의를 향해 선회했다. 이응노는 중국 도자기에서부터 아랍 캘리그라피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다양한 창작법으로부터 색채와 패턴을 빌려와 자신의 작품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공부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미술 탐구와 스타일의 폭을 지속해서 확장해나갔다.

▲ 이응노,마르코폴로,동방견문록,1980
◆제2전시 : 이응노와 서양미술


이응노가 독일 카셀 도큐멘타에서 당대 새로운 화풍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파리 앵포르멜 화단의 일원으로 활동하기까지 그가 서양의 미술과 조우한 방식을 되짚어본다.

일본에서 서양 미술의 테크닉과 스타일들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이응노가 본격적으로 세계 미술계와 교류하게 된 것은 1950년대 한국 전쟁 이후 남한 예술가들이 미국과 프랑스의 추상주의 어휘들을 수용하면서부터다.

독일에서 이응노는 그동안 잡지에서 흑백사진으로만 접해왔던 서양 회화를 직접 맞닥뜨리게 된다. 그는 이내 이 회화가 단순히 2차원의 추상화가 아니라 물질성과 질감에 대한 탐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해 콜라주 작업을 하기 위해 종이를 접거나 긁고 찢는 등 자신만의 소재로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이응노는 몇 년 동안 이러한 콜라주 작업을 지속해 마침내 1962년 당대 파리 미술계의 가장 역동적인 중심지들 가운데 하나였던 파케티 화랑에서 이 작업을 최초로 전시했다. 그렇게 이응노는 ‘에꼴 드 파리’의 일원이 됐고 이 화파와의 교류는 이응노의 작품 스타일이 새로운 독자성을 향해 옮겨갈 때도 여전히 지속됐다.

▲ 이응노,사람들,1959,한지에수묵담채
◆제3전시 : 이응노와 동양미술


이응노의 경우 서양미술계에 온전히 몸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오랫동안 전통적인 동양미술가로 인식됐다.

그 이유를 서예 작업, 전통적인 문자로부터 주제를 도출하는 작가의 취향과 1964년 설립한 파리동양미술학교에서 탐색해본다. 그의 작업에 나타나는 동아시아적 요소들은 그가 아시아에서 배우고 익혔던 것을 충실히 반영한다.

이응노가 먹과 종이라는 전통적 소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점이 시사하듯, 그는 초기 작업의 틀 안에서 미술적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서예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들의 경우 아시아적 요소들은 이응노가 새로운 스타일을 구축하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 이응노,향원정,1956,한지에수묵담채
◆제4전시 : 공인 예술가 vs 정치적 반체제 인사

1967년 세브르 국립도자기제작소와 첫 공동 작업을 하면서 이응노는 프랑스의 공식적 예술계에 통합되기 시작한 반면 남한에서는 투옥되기에 이른다. 1969년 석방됐으나 생을 마감할 때까지 남한 정치권력과는 갈등적 관계가 지속됐다. 반면 남한의 감금에서 풀려나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여러 프랑스 기관들로부터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다.

네 번째 섹션에서는 이응노에 대한 프랑스와 남한에서의 상반된 인식을 극명하게 대조해 보여준다. 1977년부터 남한에서의 활동이 금지되자 이응노는 1983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 창작된 작품들은 고국 남한에서 이응노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불러일으켰다. 예술가로서 그리고 정치적 재판과 시련의 희생자로서 명성을 떨치면서 이응노는 프랑스에서 성공적인 이력을 쌓을 수 있었다. 바카라와 같은 사립기업이나 국립기관들로부터 창작 요청을 받으면서 그는 조금씩 자신의 모국이 아니라 프랑스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예술가가 됐다.

◆제5전시 : 고국에서의 이방인

마지막 섹션에서는 1980년대 창작된 작품들에 드러나는 특성들인 1950년대 다루던 주제들과 기법들의 재등장, 광주 학살 이후 의도적으로 표현된 정치적 메시지를 고찰해본다. 1977년 이후 이응노는 더 이상 남한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1983년 그는 프랑스로 귀화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년의 작업 곳곳에는 모국을 향한 시선이 남아있다. 마르코 폴로 시리즈에 나타나듯 이응노가 상상을 통해 다시 찾은 한국은 분명 이 나이든 예술가가 소중하게 여겨온 추억이나 시공을 가로지르는 영혼의 여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시리즈는 원래 책 삽화로 기획됐으나 안타깝게도 출판된 책의 형태로 완성되지는 못했다. 이 시리즈의 그림들이나 다른 풍경화들에는 1950, 60년대 사용하던 기존의 기법들과 스타일들이 다시 등장한다.

심지어 몇몇 풍경화들은 조선 시대 옛 거장들이 그린 전통 풍경화, 혹은 이응노가 유럽으로 떠나기 전에 그린 그림들을 상기시킨다. 광주항쟁은 이응노의 회화를 더욱더 한국적인 맥락에 뿌리내리게 했다.

1970년대 말 그가 그리기 시작했던 댄서들은 이제 평화와 민주주의를 찾는 한국 민중의 전형으로 구현됐다. 최윤서 기자 cys@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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