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애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대전지역본부장

필자는 지난 6일 지역 사회복지인들과 몽골로 4박 5일간의 ‘행복나눔투어’를 다녀왔다. 여행 4일째 되는 날. 수도 울란바토르에 있는 ‘이태준 열사 기념공원’을 가게 됐다. 독립유공자 이태준 열사는 1911년 지금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갔다 지인을 통해 1914년 몽골로 이동,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운반하고 의열단 활동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한 분이었다. 또 당시 몽골에 만연해 있던 질병을 퇴치하여 1919년 몽골 정부로부터 ‘에르덴 오치르’ 훈장을 받고 몽골 왕의 어의까지 됐으나 1921년 38세에 러시아 백군에게 피살당했고 몽골의 슈바이처로 불리고 있었다.

요즘 대한민국은 제주도에 입국한 예멘인 519명의 난민신청으로 난민수용 찬반문제가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다. 난민은 인종, 종교 또는 정치적, 사상적 차이로 인한 박해를 피해 외국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일제 해방이전까지 독립운동가 들이 망명길에 나섰다. 1900년대 초에는 국경을 넘기 쉬워 만주, 연해주, 상해 지역에 도착해 독립투쟁을 목적으로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몽골의 슈바이처 이태준 열사 또한 한국의 정치 난민이었다. 해방 직후에는 제주도 4·3 사건으로 인한 난민이 발생하여 제주도민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고, 한국전쟁 당시에도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여 전쟁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일본이나 우방국인 미국 또는 제 3국을 택해 유럽으로 들어갔다. 그중 현재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노르웨이의 라면왕으로 알려진 이철호 선생. 전쟁 중엔 난민으로 인정받기 어려워 이민자로서 해당 국가에 정착한 경우도 많고, 군사 독재 시기에 정치적 망명을 떠나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들도 많다. 이런 사례로 가장 유명한 인물이 홍세화 선생이다. 또 5·18 민주화운동의 최후의 수배자로 알려져 있던 윤한봉 선생도 1981년에 장장 35일동안 화물선에 숨어서 미국으로 밀항, 망명에 성공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1970년대 당시 10월 유신을 피해 두 차례 미국으로 망명한 바 있다.

2017년 현재에도 한국 출신 난민은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가 허용되지 않고, 군대에서 동성애자들이 인권을 존중받지 못하기에 젊은 남성의 최후의 선택지가 망명인 것이다. 유엔난민기구(UNHCR)의 통계에 따르면 2016년 한 해 발생한 한국 출신 난민은 243명이다.

작금(昨今)의 사태를 보며 떠오르는 사건이 있다. 바로 1923년 일본을 뒤흔든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이다. 조선인들이 대지진의 혼란을 틈타 도둑질을 일삼고, 일본여성들을 강간한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고, 공포를 느낀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해 조선인들을 죽창으로 무참히 죽였다. 무한경쟁에 내몰린 한국사회의 현실 속에 작은 계기만 있어도 깊은 상처를 받는 구조가 돼 버린 것 같다. 공포가 지배자로 등장하는 일! 이슬람 난민은 그 원인으로 누명 씌우기 딱 알맞은 무기력한 대상이 아닌가 싶다.

식민지, 전쟁, 가난과 같은 과거 국가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전 세계인의 희생과 도움이 있었기에 현재의 경제대국을 이룰 수 있었다. 지금 상황이 한국사회의 혼란과 난민에 대한 정부 정책 미흡, 또 이슬람 문화 및 대규모 난민을 받아들일 국민들의 마음에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일어난 현상이라 생각된다. 일어나지도 않은 막연한 공포에 사로잡히지 말고, 마음을 굳건히 한 후 과거를 돌아보고 인도적 관점으로 난민을 바라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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