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요란한 듯하나 자세히 보면 힘이 없다>

춘추시대(春秋時代)도 말엽에 가까운 주영왕(周靈王) 10년, 노양공(魯襄公) 18년의 일이었다. 정(鄭)의 자공(子孔)은 심한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방해가 되는 여러 대부(大夫)를 제거하고 국권을 장악하려고 꾀했던 것이다. 당시 제후는 진(晉)을 맹주로 삼고, 대두해온 제(齊)에 대한 토벌군을 일으켜 착착 포위진을 압축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 틈을 타 자공(子孔)은 진(晉)에 반기를 들고 남쪽의 명문인 초(楚)의 군대를 사주(使嗾)하여 야망을 달성시키고자 생각했다.

사신을 초(楚)의 영윤(令尹)인 자경(子庚)에게 보내 그 뜻을 알렸으나 자경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초강왕(楚康王)이 그 소리를 듣고 자경에게 사람을 보내어 “내가 사직(社稷)을 맡아서 지킨지 5년, 아직 군대를 파견한 예가 없다. 국민들은 나를 가리켜 스스로 안일(安逸)에 젖어서 선군(先君)의 유업(遺業)을 잊었다고 생각할 런지 모른다. 대부(大夫)! 어떻게 다시 생각해 주기 바란다”고 전했다. 국가의 이익을 가장 제일로 걱정하고 있는 자경(子庚)은 그 말을 듣고 깊이 탄식했으나 상대가 국왕이고 보니 사자에게 엎드려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현재 여러 제후들은 진(晉)에게 쏠리고 있습니다만, 하여튼 어디 한 번 부딪쳐 보기는 하겠습니다. 잘 된다면 우리 주상께서도 나서 주십시오. 잘 되지 않을 때에는 군대를 회군하시도록. 그렇게 하면 손해도 없고 우리 주상의 치욕이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자경(子庚)은 군대를 이끌고 정(鄭)으로 출격해 나갔다. 정백(鄭伯)의 일통(一統)은 제(齊)나라 토벌에 참가하고 있어 자공(子孔), 자전(子展), 자서(子西)가 나라를 지키고 있었다. 자전·자서의 두 아들은 자공의 야심을 알고 있으므로 본성(本城)의 수비는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경의 군대는 각지를 전전해서 침략을 계속했으나 성하(城下)에는 겨우 이틀 동안 주문했다가 철수해야할 형편이었다. 어치산(魚齒山) 기슭을 지날 때 큰비를 만나고 추운 겨울이라 인마는 꽁꽁 얼어 군대는 거의 전멸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초나라 군사는 별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남방의 음악은 미미하고 힘이 없어 처음에는 요란한 듯하나 자세히 들어보면 힘이 없다는 것이다. <국전서예초대작가·청곡서실운영·前대전둔산초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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