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92세...김대중·김영삼·김종필 '3김' 역사속으로
영원한 2인자로 두차례 킹메이커 역할...대권과는 인연없어
빈소는 현대 아산병원, 발인은 27일 장지는 부여 선산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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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8시 15분 별세했다. 향년 92세. 김 전 총리 측 관계자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김 전 총리가 오늘 오전 순천향병원에서 별세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사진은 1973년 박정희 대통령컵 아시아 축구대회 선수입장식에서 박수를 보내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 2018.6.23 [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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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21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이 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사진은 1989년 1월년 서울 마포가든호텔에서 만난 3김. 왼쪽부터 당시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2015.11.22 << 연합뉴스 DB >>
충청도를 상징하는 김종필 전 총리가 23일 향년 92세의 일기로 노환으로 별세했다.

김 전 총리는 이날 오전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119를 통해 인근 순천향 병원으로 옮겼으나 병원 도착 당시 이미 사망한였다고 병원측은 밝혔다.

김 전 총리측은  "김 전 총리가 오늘 오전 8시 15분께 별세했다"고 밝혔다. 

김 전 총리의 빈소는 현대 아산병원에서 5일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발인은 27일 수요일. 노제를 지낸 뒤 장지인 충남 부여 선산에 안장될 예정이다.

김 전 총리의 별세로 김대중·김영삼·김종필 트로이카가 이끌어왔던 '3김(金) 시대'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김 전 총리는 한국 현대정치사를 이끌던 '3김'시대의 주역중 한명이었지만, 유일하게 '1인자' 위치에 오르지 못했다.

두 차례의 국무총리와 대선 킹메이커 역할을 했지만 정작 대권과는 인연이 없었다.

지난 192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김 전 총리는 공주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사범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지난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고 그해 치러진 6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 7·8·9·10·13·14·15·16대를 거치며 9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3김 시대'의 한 축인 김 전 총리는 35세때인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현대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같은 해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초대부장에 취임했고 1963년에는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면서 줄곧 영원한 '제2인자의 길'을 걸어왔다.

5.16구테타 세력다툼으로 공화당 창당과정에서 증권파동 등 이른바 '4대 의혹사건'에 휘말리면서 63년 2월 '자의반 타의반' 1차 외유를 떠나게 된다.

 이어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의 주역으로서 핵심쟁점이던 대일 청구권 문제와 관련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으로 6·3사태가 일어나자 1964년 또다시 2차 외유길에 올랐다.

김 전 총리는 이후 1971년부터 1975년까지 4년 6개월 간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후 1980년 5공화국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려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다.

김 전 총리는 1984년 미국으로 건너가 유랑생활을 하다 1986년 귀국한 뒤 충청권을 중심으로 한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했으나 4위에 그쳤지만 1988년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기반으로 35석의 국회의원을 확보하면서 정치권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된다.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2인자'의 길을 걷게 되면서 '충청권 맹주'로 자리를 잡게 된다.

1992년 대선에서 킹 메이커 역할을 하면서 김영삼(YS) 당시 대선 후보를 지원해 당선시켰다.

1995년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고, 그 여세를 몰아 1997년 대선에선 자민련 후보로 다시 대권에 도전했다.

그는 여야 정거교체 명분을 내세워 선거 막바지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성사시키며 김대중(DJ)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함으로써 첫'DJP 연합'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맡기도 했으나 김대중 대통령과 갈등을 빚은 김 전 총리는 2004년 17대 총선을 통해 재기를 시도했으나, 자신의 10선 도전 실패와 함께 고작 4명의 의원만 배출하는 참패를 당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김 전 총리는 쿠데타 원조에서부터 중앙정보부 창설자, 풍운의 정치인, 영원한 2인자, 경륜의 정치인, 처세의 달인, 로맨티스트 정치인 등으로 불리면서 영욕과 부침을 거듭해왔다.

유족으로는 아들 진씨, 딸 복리씨 1남1녀가 있다.  

서울=박명규기자 mkpark0413@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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