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태 교수의 백제의 미를 찾아서 - 12 익산왕궁리오층석탑]

익산군 왕궁면 보물 44호, 언덕에 위치해 웅장함 배가

높이 805㎝. 고려 초. 전북 익산군 왕궁면. 보물 44호 왕궁리(王宮里)는 그 이름만 보아도 알만하다. 백제말기에 천도설이 있었고 별궁이 있었다고도 한다. 충청 전라지역에 석탑들이 많은데 대체로 부여 정림사지탑을 모본(母本)으로 지역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 왕궁리탑이 부여 정림사지탑과 닮은 점이 많고 크기도 비슷한데 언덕에 자리해서 그런지 더 크게 보였다. 이른바 ‘백제식 석탑’의 대표작이라고 알려져있다.

우리나라는 탑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국곳곳에 돌탑이 세워져있다. 사찰마당뿐만 아니고 경관이 좋은 산마루에다 적정한 모양으로 만들어 세우기도했다. 경주 남산의 경우가 좋은 예이다. 장소(場所)성을 챙기는 안목도 놀랍거니와 그 미적 감각의 뛰어남을 찬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도에서 만든 탑이 중국으로 건너와서 모양을 잡았고 한반도 백제땅에서 조형미술(造形美術)로서 완벽한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독창성과 멋과 종교철학이 어우러져서 한국미의 정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미술대학 조소과 학생들을 인솔하고 백제문화권 탐방을 한 일이 있었다. 공주로 부여로 익산 미륵사지탑을 거쳐서 왕궁리로해서 전라남도 화순 천불천탑 마을로 마감하는 2박3일의 큰 걸음이었다. 왕궁리 들 가운데에 서 있는 두 분의 돌부처들을 보고서 우리들의 버스가 마을길로 들어섰는가 했는데 갑자기 탁 트인 공간을 만났고 예고 없이 왕궁탑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 순간 차 속에서 학생들의 와! 하는 함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두 대의 버스에서 떠나 갈듯이 말이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돌발사건이었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감격케하였다. 더 무슨 말을 보태랴. 백 명의 조각전공학생들이 환희의 함성으로 응답한 것이다. 석탑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무처럼 산처럼 오늘도 거기 그렇게 서 있다.

우리의 옛 선조들이 동아시아 최고의 아름다운 예술을 만들었다. 미의 최고의 높이를 형태로서 실현했다는 말이다. 그들이 살았던 땅을 내가 지금 거닐고있다. 어찌 감회가 없겠는가.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예술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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