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가 망하고, 천하는 한(漢)에게 돌아갔고한왕 유방(劉邦)이 한고조가 되었다. 그 이듬 해(한고조 6년 B.C201)의 일이다. 조서(詔書)가 엄숙하니 제후에게 내려졌다. “짐(朕)은 이제부터 운몽포(雲夢浦)로 유행(遊幸)한다. 그대들은 수행(隨行) 준비를 갖추고 초(楚)의 진(陳)에 모여라.” 이것에는 까닭이 있다. 당시 한신(韓信)이 초왕(楚王)으로 봉해져 있었으나 그 한신의 밑에 항우의 용장이었던 종리매(鐘離昧)가 있었다. 그 전 싸움에서 종리매 때문에 누차 고전을 맛 본 고조(高祖)는 그를 심히 미워해 그의 체포를 한신에게 명했으나, 전부터 종리매와 친교가 있던 한신은 명을 듣지 않고 도리어 그를 숨겨주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한신은 모반을 꾀할 뜻이 있다”고 상서한 자가 있었으므로 고조는 진평(陳平)의 책략에 따라 유행(遊幸)을 구실로 제후의 군을 소집한 것이다.

사태가 이쯤 되자 한신은 불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약삭빠른 가신(家臣)이 한신에게 속삭였다.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배알하시면, 폐하도 기뻐하시고, 우리 주군께서도 우려(憂慮)하실 사태가 없어지실 것입니다.” 옳다고 생각한 한신은 그 말을 중리매에게 했다. 그러자 종리매는 “고조(高祖)가 초(楚)를 침범하지 못하는 것은 자네 밑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네가 나를 죽여 고조에게 미태(媚態)를 보인다면 자네도 얼마 안 가서 당할 것일세, 정말 한심한 일을 생각했구나”하고 욕을 하고 나서 스스로 목을 쳤다. 그 목을 가지고 한신은 진(陳)으로 갔는데 과연 모반자(謀反者)라는 죄목으로 체포되고 말았다. “교토가 죽어서 양구가 삶아지며, 비조(飛鳥)가 없어지자 양궁이 감추어지고 적국이 파멸되어 모신이 망한다라고 하는 데 참으로 그렇구나. 온갖 힘을 다해 한(漢 )을 섬긴 내가 이번에는 고조(高祖)의 손에 죽는 구나” 교토란 말은 전국책에서도 많이 쓴다. <국전서예초대작가·청곡서실운영·前대전둔산초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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