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우 청주시노인종합복지관장

가톨릭 신학의 한 분야인 사회교리(사회학)의 개념 중에는 '공동선(共同善)'이 있다. 물론 가톨릭 신학 이외에 철학이나 경제학 등의 영역에서도 이 개념은 사용되지만, 강조점에 있어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최소한 가톨릭 사회학 안에서 말하는 공동선은 재산의 공유를 추구하는 '공산주의'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말하는 '공리주의', 또한 국가를 위해 국민의 무조건적인 순종을 내포하는 '전체주의'와는 차별을 둔다.

공동선의 중심은 '인간의 존엄성'에 있다. 즉 인간의 존엄성이 최대한 실현되는 것을 사회 공동체가 추구해야 될 선(善)으로 여기고 이를 실현해 나가는 것을 공동선이라 한다.

지난 4월 27일 전세계를 감동시킨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다. 일촉즉발의 불안한 상황 속에서 남과 북이 대치되고,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장담할 수 없었던 시간이 그리 먼 과거 이야기가 아닌데, 마치 다정한 부자(父子)와도 같은 두 정상의 훈훈한 만남은 국민적 불안과 공포를 없애고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전세계 언론들은 두 정상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했고, 평화를 갈망하는 세계인들에게 흐뭇한 미소와 촉촉한 감격의 눈물을 선물로 줬다.

감격스러운 정상회담이 치러진 다음날 역시 정상회담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많은 기사들 중에 유독 필자의 시선을 끄는 내용들이 있었다. 바로 남북정상회담 이후 요동치는 휴전선 인근 도시의 부동산에 관한 내용들이다. 정상회담이 한달여 지난 요즘도 심심치 않게 비슷한 내용의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북한의 비핵화 과정에 필요한 경비가 2100조에 달한다는 제1야당 수석대변인의 주장에서부터, 북한에 매립돼 있는 광물자원의 가치, 일자리 창출에 대한 기대감, 코스닥 최대 수혜주 등 경제적 손익을 기준으로 북한의 비핵화 과정과 남북통일에 대한 가치와 기대를 가늠하곤 한다.

남북한이 분단의 장벽을 넘어 한반도에 평화의 시대를 정착하는 것은 우리민족이 지닌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이 과업은 단지 경제적 논리에 따라 필요하면 행하고, 손실이 있다 여겨지면 포기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다. 분단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루다 나열하기 힘든 아픔을 겪어 왔다. 남북의 대립과 전쟁의 공포 속에 국가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개인들이 희생을 강요당했으며, 심지어 '분단'의 프레임을 활용해 자신의 욕심을 채워나간 정치지도자들도 있었다. 또한 북한주민들의 인권유린 실태는 아직 제대로 확인조차 되지 않는다. 평화는 눈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 이뤄내야 할 과업이 아니다. 부자(富者)가 되기 위해 비핵화와 남북한의 화해를 원해서도 안 된다.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은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남과 북이 대립돼 불안과 공포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전쟁의 공포에 얽매여 지낸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이 유린당하고 사회정의가 심각하게 훼손될 위험을 안고 사는 사회와도 같다. 우리민족이 지닌 '원죄(原罪)'를 넘어 참된 자유와 해방을 이룩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노력을 단지 경제적인 가치로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의 분위기이다. 아직 불안요소가 많이 남아있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이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남과 북이 함께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겠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경제적 이득이 아닌,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공동선이 실현되는 여정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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