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규의 서예이야기]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로서 유명한 삼국정립시대(三國鼎立時代)로 접어들기 1년 전 후한헌제(後漢獻帝)의 건안 二四년의 일이다. 비육지탄을 노래삼은 보람이 있어 익주(益州)를 영유한 유비(劉備)는 한중(寒中)을 평정시킨 다음 유비 토벌의 군을 일으킨 위(魏)의 조조(曹操)를 맞아 역사적인 한중 쟁탈전(寒中爭奪戰)을 시작하고 있었다.

싸움을 수개월에 확보하고 있는데 반해 조조는 병참이 빠져 도망병이 속출하고 전진도 수비도 불가능한 딜레마에 빠졌다. 그래서 조조는 계륵(鷄肋)이란 명령을 내렸다. 무슨 소리인지 몰라 부하들은 여우에게 흘린 듯 어리둥절 했다.

그런데 조조의 군대에 양수(楊修)라고 하는 은어(隱語)를 잘 푸는 주부(主簿)가 있었다. 홍농(弘農) 사람으로 자(字)는 덕조(德祖)라고 하고, 처음 효렴(孝廉)으로 임관했다가 낭중(郎中)을 거쳐 주부(主簿)가 된 학문을 좋아하는 준재(俊才)였다. 그런데 양수(揚修)는 조조의 이 명령을 듣자 혼자서 부지런히 수도 장안으로 귀환할 준비를 시작했다. 모두들 놀라 그 까닭을 묻자 양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닭의 갈비뼈는 먹을 만한 곳이 없다. 그렇다고 내버리는 것도 아깝다. 한중(寒中)을 이에 비유했으므로, 왕(위왕 조조)께서는 귀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과연 조조는 위의 전군을 한중에서 철수시켰다.(後漢書 楊修傳)

계륵(鷄肋)이란 무미(無味)의 비유, 그리 도움도 되지 못하나 버리기는 아까운 사물에 비유한다. 송대(宋代)에도 이 뜻을 따서 계륵편(鷄肋篇)이란 서명(書名)에도 쓰이게 되었다. 계륵은 몸이 마르고 약한데 비유해서 쓰이기도 한다. 닭의 늑골같이 골격이 빈약한 몸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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