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태 교수의 백제의 미를 찾아서 - 7 추사 김정희]

[최종태 교수의 백제의 미를 찾아서 - 7 추사 김정희]
충남 예산 신암면 출생, 신의에 보답 ‘세한도’ 국보, “천자루의 붓이 몽당붓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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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신안구가)중안자
추사 예서글씨 新安舊家 중 ‘安’자. 간송미술관 소장. 충남 예산 신암면 명문세도가 명필 집안에서 태어났다. 25세 때 동지부사 아버지를 따라 연경(베이징)에 갔을 때 당대 최고의 학자 옹방강(翁方綱·78세)이 보자마자 사제의 의를 맺고 아들들을 불러 의형제를 맺었다. 희귀한 책들을 보여주고 떠날 때는 크게 송별연을 열었다하니 젊은 추사의 재기가 얼마 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제자 이상적(李尙迪)이 중국을 내왕하면서 귀중한 책들을 보내 주고 하여 그 변함없는 신의에 감동해서 그려준 그림이 저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다. 세한도(국보 제180호)가 중국에 갔을 때 16명의 명사들이 찬사를 적은 것은 참으로 멋있는 사건이었다. 추사가 그림 옆에 한편의 글을 적었는데 대충 번역하면 이런 내용이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이 있을 때 가까이하다가 권력 떨어지면 모른 척 하는 것인데 자네는 어찌하여 나를 지금도 권력자 대하듯이 하는 가. 태사공(太史公)이 말하기를 권력으로 합친 자는 권력 떨어질 때 함께 떠난다했다. 공자님이 말씀하기를 세한(歲寒) 이후에야 송백(松柏)의 참뜻을 알게 된다 하였다. (세한도 늙은 소나무 옆에는 잣나무가 셋이 서있는데 그중 하나는 소치(小癡)선생이고 둘은 이c상적과 초의(艸衣) 대선사이다.)

몇 해 전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명청(明靑) 글씨 큰 전람회가 있었다. 큰 글씨 작은 글씨가 꽤나 많이 걸려있었다. 보면서 여기에 추사글씨가 두 점만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났다. 청나라에 추사만한 글씨가 있을까해서 하는 말이다.

‘법이 있어서도 안 되고 없어서도 안 된다’ ‘열개의 벼루가 구멍이 났고 천 자루의 붓이 몽당붓이 됐다.’- 추사의 말

조선시대 500년의 끝머리에서 희대의 천재 추사 김정희선생이 나왔다. ‘글씨를 그림같이 그림은 글씨같이’말로는 쉽지만 그것을 실현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이다. 여기 사진은 평안 安자 글씨인데 글씨인가 그림인가. 동양 그림인가 서양그림인가. 추상인가 구상인가…. 끝나지 않는 길고 긴 여운이 있다. 그것이 추사의 매력이다.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예술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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