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 문화카페]

▲ 베르덩 전쟁기념관-박물관 포스터.
매년 50여 만 명이 프랑스 조그만 도시 베르덩 격전지를 찾는다. 쓸쓸한 유명세. 전쟁의 야만성이 남긴 흔적과 악명이 베르덩의 도시 이미지로 굳어진 듯하다. 그러나 참혹했던 과거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고 베르덩은 역설적으로 평화의 상징이 되려는 의식적 노력과 표현에 공을 들이고 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난트가 세르비아 저격수에 의하여 사라예보에서 암살된다. 동맹관계를 맺은 유럽 각국은 즉각 전쟁에 돌입하고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영국·프랑스·러시아·벨기에 대 독일·이탈리아·오스트리아가 격돌한다. 단기간에 끝날 것으로 예상했던 전쟁은 4년에 걸친 전면전이라는 무서운 결과로 이어졌다. 승전국 프랑스는 보불전쟁으로 독일에 빼앗겼던 알자스, 로렌지방을 회복했고 해외 식민지도 늘었지만 상처는 컸다. 베르덩이 그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베르덩은 38곳의 요새와 보루, 성채, 바위 밑 7㎞ 지하도 등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첫째가는 전쟁 요충지가 되었고 1914~1918년 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덩은 세계 5대 전쟁관광지의 하나로 꼽힌다. 1916년 2월 21일 독일의 가공할 공격에 베르덩 지역 요새 주변은 참극의 현장이 되었다. 빗발치는 포화 속에서 명령은 단 하나 '사수하라’였다. 이후 인근 9개 마을이 지도에서 사라졌고 50만 명이 희생되었다. 그로부터 70년 후 1984년 그 격전의 현장에서 프랑스, 독일의 국가원수가 손을 잡았다. 1987년에는 유엔으로부터 세계평화, 자유, 인권을 상징하는 조각물을 기증받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꼭 100년이 되는 올해 남북대화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70년간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우리 DMZ 155마일을 평화생태공원으로 조성한다면 베르덩의 명성쯤은 쉽게 넘어설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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