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난트가 세르비아 저격수에 의하여 사라예보에서 암살된다. 동맹관계를 맺은 유럽 각국은 즉각 전쟁에 돌입하고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영국·프랑스·러시아·벨기에 대 독일·이탈리아·오스트리아가 격돌한다. 단기간에 끝날 것으로 예상했던 전쟁은 4년에 걸친 전면전이라는 무서운 결과로 이어졌다. 승전국 프랑스는 보불전쟁으로 독일에 빼앗겼던 알자스, 로렌지방을 회복했고 해외 식민지도 늘었지만 상처는 컸다. 베르덩이 그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베르덩은 38곳의 요새와 보루, 성채, 바위 밑 7㎞ 지하도 등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첫째가는 전쟁 요충지가 되었고 1914~1918년 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덩은 세계 5대 전쟁관광지의 하나로 꼽힌다. 1916년 2월 21일 독일의 가공할 공격에 베르덩 지역 요새 주변은 참극의 현장이 되었다. 빗발치는 포화 속에서 명령은 단 하나 '사수하라’였다. 이후 인근 9개 마을이 지도에서 사라졌고 50만 명이 희생되었다. 그로부터 70년 후 1984년 그 격전의 현장에서 프랑스, 독일의 국가원수가 손을 잡았다. 1987년에는 유엔으로부터 세계평화, 자유, 인권을 상징하는 조각물을 기증받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꼭 100년이 되는 올해 남북대화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70년간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우리 DMZ 155마일을 평화생태공원으로 조성한다면 베르덩의 명성쯤은 쉽게 넘어설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