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외국어 전파담'

▲ [혜화1117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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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나…언어의 문화사

신간 '외국어 전파담'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바야흐로 영어의 시대다. 세계 어디를 가든 영어 간판이 넘쳐나고 영어 구사력이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현대 영어의 종주국인 미국에서도 비원어민을 비하하는 영어 우월주의가 팽배하다. 트럼프 행정부는 영어 구사력을 이민 심사기준에 포함하는 새 이민법을 들고나와 논란이 됐다.

영어는 세계 만민이 익히고 배워야 할 만국 공통어가 됐다. 인류 역사상 한 언어가 이처럼 막강한 권위를 갖게 된 것은 실로 처음이다.

신간 '외국어 전파담'(혜화1117 펴냄)은 고대 문명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주요 언어들의 발생과 전파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영어가 지금처럼 세계를 제패하게 된 이유를 드러낸다.

사람들은 왜 영어에 목을 매는 걸까.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주류 언어의 습득이 부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 됐음을 알 수 있다.

과거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가, 중동에서는 아랍어, 인도에서는 산스크리트어, 중국과 아시아에서는 한자, 메소아메리카에서는 마야어가 주변 지역에서 패권을 형성했던 때가 있다.

핵심 지배층은 물론 주변 세력들도 신분의 안정과 권위를 보장받기 위해 해당 문화권의 주류 언어를 배워야 했다.

오늘날과의 차이는 학습 대상이 '말'이 아니라 '문자'였다는 것이다.

조선 사대부들이 중국어를 구사하진 못했으나 한문을 능통하게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을 통해 지배력을 유지했던 것과 같은 이치다.

책은 고대에서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언어가 정치적 패권을 관철하고 종교를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돼왔음을 보여주는 풍부한 사례들을 제시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외국어'의 개념이 등장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라고 지적한다.

근대 국가가 성립된 이후 권력이 중앙집권화되고 민족주의가 부상하고 국가 간 경계를 뚜렷이 구분할 필요가 생기면서 외국어라는 말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무렵 무역, 이민, 여행, 유학 등 다양한 인적 교류가 확대되면서 일반 대중들도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울 필요가 생겼고, 이를 위한 교육이 확산되면서 외국어를 배운다는 개념도 일반화됐다.

한낱 변방의 언어였던 영어가 세계 무대의 중앙에 등장한 것은 19세기 영국 제국주의와 산업혁명이 확산하면서다. 이어 20세기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의 정치·경제적 패권을 틀어쥐면서 영어의 지위도 확고해졌다. 그리고 미국이 영어에 기초해 개발·보급한 인터넷이 1990년대 전 세계로 퍼지면서 영어는 세계의 표준이 됐다.

저자는 미국 언어학자인 로버트 파우저(57)다. 그는 1988~1992년 고려대에서 영어를 가르쳤으며, 2008~2014년 서울대 국어교육학과 교수로 한국어 교육 관련 강의를 했다.

그는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몽골어, 중국어 등 각국의 언어를 두루 섭렵했다. 책 곳곳에 동서양을 아우르는 언어들을 배워 현지인들과 소통할 줄 아는 저자의 폭넓은 언어생활과 편견 없는 언어관이 배어 있다.

온 세계 문헌에서 찾아서 수록한 희귀하고 흥미로운 시각 자료들도 저자의 독특한 언어적 경험들을 반영한다.

그는 언어가 여러 문화권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한 지배·피지배 관계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서구 중심의 언어관에서 벗어나고자 애쓴다.

영어가 모어이면서도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어로 집필한 것은 역사적·사회적으로 틀지어진 언어적 편견을 버리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으로 읽힌다.

그는 영어의 미래에 대해 영어가 전 세계 공통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고 그 운영 체제가 다른 언어로 변경될 가능성이 현재로선 희박하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만국 공통어로서 영어가 대체될 가능성은 있고 그 합리적인 대안은 다른 언어가 아니라 정보기술에서 찾는 것이 현명하다고 본다.

인공지능(AI)의 발전으로 통역이 자유자재로 이뤄질 경우 외국어 구사력이 보장했던 각종 특권도 사라질 것으로 예상했다. 나아가 외국어 습득이 사회적 자본을 확보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다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교양 있는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기 위한 도덕적 행위가 될 것으로 봤다.

"21세기 최첨단 정보기술의 발전이 예견되는 이때 외국어를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은 변화되어야 한다. 지난 수 세기 특수한 계층이 외국어를 통해 누려온 기득권의 재생산 대신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평화와 화해의 시대를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또 다른 의미의 사회적 자본의 획득으로 외국어는 기능해야 한다."

abullapi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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