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칼럼] 
존 엔디컷 우송대학교 총장

아버지가 우는 걸 평생에 두 번 보았다. 한 번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고 다른 한 번은 당신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에서였다. 아버지는 캔자스 주 피츠버그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린 나를 데리고 신시내티에서 500마일이나 떨어진 그 곳으로 향하면서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아버지는 점점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마침내 언덕을 넘었을 때 그곳에는 늙은 버드나무 하나만 외로이 서있었고 집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흔적만 남아있었다.

당신이 자라던 모습과 가족들이 정든 집을 떠나던 모습과 그리고 오래된 집이 허물어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던 버드나무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의 설명으로 눈에 선명하게 그려지던 그 옛집이 지금 그 자리에 없다는 놀람보다도 집이 사라진 것이 아버지에게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슬픔에 버금가는 애통함이라는 것이 더 큰 충격이었다. ‘Never Go Back.’ 추억과 현실이 충돌할 때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경고의 문구다. 필자는 아버지의 눈물 때문에 이 말을 깊이 받아들이고 살아왔는지 모른다.

지난주에 하와이 호놀룰루를 방문했다. AACSB(국제경영대학발전협의회) 연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호놀룰루는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지만 우리부부에게 아주 특별한 장소다. 미 공군 소위로 소임을 다하기 위해 신혼생활을 시작한 곳으로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지냈던 첫 번째 보금자리는 마노아 밸리의 하와이대학교 뒤 지하층 아파트였다. 꼭 56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어린 시절 보았던 아버지의 눈물은 자꾸 흥분되는 마음을 스스로 억누르게 만들었다. 우선 동 마노아 길에 사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택시를 탔다. 목적지에 이르러 집 문 앞에 섰을 때 심호흡을 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56년 전의 미소와 56년 전의 다정한 모습을 한 친구와 상봉할 수 있었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지난 50여 년 간의 살아온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다음 날은 히컴 공군기지를 방문했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서 정문에 들어서기 전부터 많은 것이 변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를 안내한 초병은 56년만의 방문을 환영한다며 환한 미소를 보였다. 그 초병은 히컴 Officers' Club을 추천해 줬다. 클럽마다 열렸던 파티와 행사를 기억하며 돌아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다가와 우리의 방문목적을 물어왔다. 오랜만에 돌아왔고 당시의 이야기를 하자 그 역시 멋진 미소를 보이며 목요일에 열리는 몽골리안 바비큐 파티에 기꺼이 초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다음에 들린 곳은 첫째 딸을 낳은 트리플러 육군 병원이었다. 고물거리며 눈도 뜨지 못한 첫 아이를 만났던 그 기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 다음엔 필자부부가 살았던 래드포드 테라스, 펠티어 드리이브, 호놀룰루의 높은 물가를 감당하기 위해 주말마다 일했던 아라 모아나 YWCA를 둘러보았다. 길고도 긴 세월. 물론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Never Go Back.’은 과감히 버렸다. 여러분도 과거와 추억과의 만남 앞에서 주저하지 말고 반드시 ‘Go Back’할 것을 권한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