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윤석 을지대병원 산부인과 교수

현재 우리는 4차 혁명의 초연결사회에 살고 있다. 모든 구성원들이 상호 연결되어 있고 댓글이나 쪽지의 형태로 실시간으로 의견을 나누며 집단지성을 만들어낸다. 타인의 행복과 가치가 나와 공유되는 세상이다. 이를 '매크로위키노믹스'라고 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집단지성이 우리의 삶을 바꿔놓는 문화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매크로위키노믹스는 인간의 욕망을 지렛대로 집단의식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기본 가치와 사고가 매크로 범주에 종속될 위험이 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이다. 사람은 욕망을 쫒고 쾌락이 충족되는 순간 '만족'을 하지만, 또 다른 욕망이 생기면서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낮은 단계의 쾌락, 감각적 쾌락이다. 하지만 이런 쾌락뿐만 아니라 높은 수준의 쾌락도 인간에게 존재한다.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에피쿠로스(기원전 341~270)의 쾌락주의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대중적으로 정리한 것이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 On the Nature of Things)' 라는 책이다. 인간의 감각 그 자체가 스스로 '참'을 전하는데, 불필요한 욕망이 해석의 오류를 낳고 고통을 느끼게 한다.

사실 높은 수준의 평온한 쾌락을 즐겼던 사람들은 대부분 장수하고 건강한 편이었다. 고대 로마의 키케로는 정치적 박해와 내란 등의 어려운 시기에 높은 단계의 쾌락을 통해 84세에 '노년에 대하여'를 저술하기도 했다. 13억 중국인의 정신적 스승인 지셴린는 문화혁명의 고난을 겪으면서도 미술, 정신 수양, 이타적 사랑이라는 탁월한 쾌락의 유희를 통해 98세까지 저술활동을 한다. 우리나라의 정약용도 40대 신해박해 유배와 상처의 고통을 고요한 삶으로 보존하고 약 300권의 저술활동을 했다. 모두 자신의 허물과 위기를 높은 단계의 유희를 통해 꽉 찬 인생으로 만든 것이다. 이런 평온한 행복은 뇌의 전전두엽과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를 자극해 고령에도 불구하고 총기를 유지하게 하고 장수를 견인하게 된다. 최근 사회 유전자 연구에 따르면 고상한 목적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고용한 쾌락이 세포 건강에 이익을 가져오는 반면, 단순한 감각적 쾌락은 장기적으로 세포 건강에 부정적인 효과를 주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최근 댓글 매크로 사건이 화제다. 언론에서는 여론 조작에 방점을 두지만, 이보다는 인간의 욕망과 기술이 만나는 경계선에서 인간의 존엄에 도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댓글 세상에서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 안 틀렸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곳은 공동으로 허구를 창작하고, 그것을 집단으로 믿음으로써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감각적 놀이터일 뿐이다. 잘못을 지적하면 '놀이 망치는 놈(Spielverderber)'이 될 뿐이다.

기원전 300년 시대는 모든 것이 매크로인 세상, 신 아래 숨은 율법학자가 인간의 실존을 욕보여도 잘못이라고 지적하면 세상을 망친놈이 되어버리던 시대였다. 이에 대한 반기가 에피쿠로스다. 인간의 욕망과 신이 만나는 경계 속에서 인간도 욕망의 전차에서 뛰어 내리면, 자율적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를 계승한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 등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존재임을 선언한다. 이처럼 에피쿠로스주의는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을 보여 주고 있다.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나는 에피쿠르스주의자'라고 말할 정도였고, 미국 독립선언문의 행복추구권도 사실 사물의 쾌락을 행복으로 살짝 바꾼 것이다. 최근 화자되는 매크로가 인간의 존엄에 대한 도전인 이유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곳엔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이 존재 할 수 없고, 인간의 실존에서 자유의지가 존재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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