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채워지지않는 어머니 빈자리”

엄마와 노랫말 흥얼거리기를 좋아했던 11살 꼬마 아이는 어느새 일흔의 나이를 훌쩍 넘겼다. 대전에 터를 잡고 살아간지도 50년 남짓, 3남 1녀에 외손자까지 합하면 17명에 이르는 대가족도 일궜다. 남 부끄러울 것 없이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채워지지 않는 누군가의 빈자리에 자신의 행복을 완성할 수는 없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나면서 아버지와 월남한 서종근(78) 씨. 그는 할머니, 어머니, 두 명의 남동생과 이별해 이산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수십년을 살아왔다. 11년만에 남북 정상이 만나는 역사적인 회담을 앞두고 그는 떨어졌던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하루가 남다르다.

“함경북도 홍원군 삼호면 20번지, 지금도 지도를 그리라면 그릴만큼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내 고향은 공기가 깨끗한 어촌 바닷가 마을이었다. 동네에 배가 한 척 있었는데 겨울이 되면 주민들이 다 같이 타고 나가서 명태나 꽂게, 털게를 많이 잡아왔다. 임금 대신에 잡아온 고기를 나눠먹는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때 전쟁이 터지면서 아버지와 나룻배를 타고 고향을 떠나 남으로 내려왔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뒤따라오겠다고 했었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 한맺힌 70년이다. 가족을 두고 내려온 사람의 아픔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대전 실향민 서종근 氏
1950년 전쟁 터지고 아버지와 월남
열 한살 꼬마아이… 낼모레면 팔십이
고향 그리던 아버지는 하늘로 떠나…
北에서 어머니께 배운 노래도 생생
막내 동생은 만나면 알아볼지 걱정
베를린 장벽 무너진 ‘기적’ 우리도…
▲ 남북정상회담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25일 이산가족 서종근(78) 씨가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의 이름이 담긴 족보를 가리키며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서 씨는 "이번에 우리 일천만 이상 이산가족들의 한이 풀어질 수 있는 기회가 꼭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재훈 기자 jprime@cctoday.co.kr
서 씨가 원하는 것은 단지 북녘에 두고온 가족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하는 것이다. 수차례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했지만 그에게 기회는 닿지 않았다. 살아있을때 고향 땅이라도 한 번 밟아보자 염원했던 그의 아버지는 환갑도 못 넘기고 세상을 떴다.

“중학교 3학년 음악시간에 선생님께서 노래하라고 할 때 머릿속에 한 노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북에 있을 때 어머니에게 배운 노래, ‘아 목동아’. 그 노래를 지금까지도 절대 못 잊는다. 바로 밑에 동생은 7살이었는데 얼굴이 동글동글해서 일본어로 별명이 콩을 뜻하는 마메(まめ)였다. 막내 동생은 늘 어머니가 등에 업고 있어서 얼굴조차도 기억나지 않는다. 워낙에 어렸다보니 형제간의 우애를 느낄 시간조차 없었다. 이제 동생들도 자식도 낳고 손자들도 봤을 것이다. 지금 살아계신다면 어머니의 나이는 94세, 동생들의 나이도 75세와 72세정도 됐다. 만나면 서로 못 알아볼 수도 있고 거창한 얘기를 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살아있는지 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다면 내 생에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는 이산가족들의 애타는 그리움을 남북 정상이 꼭 유념해야 한다고 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기적이 우리 민족에도 올 것이고 또 반드시 와야 한다고 말했다.

“배가 됐든 기차가 됐든 조금만 더 가면 갈 수 있는데 그 짧은 거리를 아직도 못 가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분단의 고통은 제3자가 아닌 우리 단일민족이 받고 있다. 독일이 통일된지 올해로 29년인데 우리한테도 그런 햇빛이 와야 한다. 이제 생존해있는 이산가족 1세대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역사적인 남북 두 정상의 만남에서는 물론 중요한 다른 의제도 많겠지만 무엇보다 우리 1000만 이상 이산가족들의 한이 풀릴 수 있는 기회를 두 정상이 만들어줬으면 한다. 이는 핵문제보다 중요하다. 이념때문에 갈라진 한 핏줄, 한 민족 남북이 다시 만나는 것은 다른 누가 아닌 우리가 반드시 해결할 문제다.”

홍서윤 기자 classic@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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