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4주기] 당시 민간 잠수사 이강호씨, “더 빨랐다면 2/3 살았을것”
급박한 상황 속 국가는 뒷짐, 물이 두려워져… 직업도 바꿔

▲ 세월호 참사 4주기를 맞아 당시 민간잠수사로 자원봉사를 갔던 이강호 씨는 "아이들을 살리지 못한 것, 그게 아직도 가슴 아파고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사진=홍서윤 기자
바다가 어느 곳보다 익숙했다던 그는 이제 물가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직업도 바꿔버렸다.

2014년 4월 16일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가라앉은 그날. 당시 한국수중환경협회 대전본부 사무총장이었던 민간잠수사 이강호(61) 씨는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그는 뉴스를 보자마자 동료 10여명을 소집했고 다음날 새벽 생존자를 구조하려 사고현장인 전남 진도 해상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도착하고도 며칠간을, 가라앉는 배를 보면서도 아이들을 삼킨 바닷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사고 초기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정부 차원에서 진입을 차단시켰다. 한 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해경청장이고 죄다 높은 사람들이 모두 팔짱만 끼고 앉아 있었다. 마치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려 작전을 세운 듯했다. 밤이 되면서 배는 점점 가라앉았다. 아이들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이 한 일은 침몰한 세월호에서 희생자를 수습하는 것이었다. 그 잔잔했던 바다는 단원고 학생들을 포함해 세월호에 탔던 승객 476명 중 304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이중 5명의 유해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했어야 했다. 정부는 수수방관했다. 우리 민간잠수사들이라도 구조활동을 할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차단당하고 무시당했다. 그 당시 배가 기울어서 물이 찬 상태라 탑승자 전원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도 좀 더 일찍 나섰으면 3분의 2이상은 살렸을 것이다. 살릴 수 있는 인원을 못 살렸다.”

살려주지 못했다는 무력감은 고스란히 죄책감으로 남았다.

“동료 잠수사 한 명은 끝내 자신의 조카를 살리지 못했다. 다른 잠수사 손에 시신으로 수습됐다. 또 한 명의 잠수사는 바닷속으로 들어갔다가 시신의 팔이 구조물에 끼어있어 결국 못 꺼내고 올라왔다. 당시 시야가 10㎝도 안되던 때라 다음날 다시 구조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날 그 잠수사는 밤새 잠도 자지 못하고 술만 먹으며 괴로워했다. 아이들을 살리지 못한 진도의 모든 낮과 밤은 우리에게 늘 죄책감이자 괴로움이었다.”

그들은 아물지 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살리겠다는 마음에 자발적으로 찾아갔지만 방해된다는 정부에 쫓기듯 떠났다. 죽거나 다쳐도 어떠한 책임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서약하고 몸 바쳐 뛰어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어떠한 지원이나 고생했다는 말조차도 듣지 못했다. 두렵다. 직업도 바꿨다. 이제 어떠한 보람이나 의미가 없어 취미생활도 안 하고 물에 관심조차 안 가진다.”

그는 수많은 생명이 처참하게 가라앉은 그날 국가는 어디에 있었냐고 묻고 또 물었다.

“시간이 간다고 잊을 수 있겠나. 나라가 저지른 일에 국민들만 희생을 당했다. 국가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나.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그날 세월호의 진실이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 늦게나마 우리 어른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다.” 홍서윤 기자 classic@cctoday.co.kr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