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 청주시노인종합복지관장

언젠가 독일인 친구와 한국과 독일의 사회·문화적 차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독일인 친구는 한국의 여러 문화 중에서도 특별히 대형마트와 백화점, 편의점들의 영업시간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그 당시에는 아직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2012년 1월 17일)이 나오기 전이었기에 24시간 편의점 뿐만이 아니라, 대형마트들 또한 연중무휴에 가까운 영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은 저녁 7~8시만 되면 대형마트나 백화점 뿐만이 아니라 골목의 작은 가게들까지도 영업을 마치던 시기였다. 또한 일요일은 특례업종을 제외한 영업점들이 휴점을 했다. 지금은 일부 슈퍼마켓들이 평일 밤 10시까지 영업을 하는 경우는 있지만, 이러한 분위기는 여전하다. 아무튼 그 친구의 첫 질문은, 일요일도 그렇게 영업을 하면 직원들은 언제 쉬냐는 것이었다.

나는 직원들마다 휴일이 따로 지정돼 있어 독일처럼 주 5일 근무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다음 질문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바로 "그렇게 쉬는 날이 각자 다르면, 가족들은 언제 함께 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한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 공동체인 가족의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휴식을 취하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사회문화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이라 생각된다.

OECD 발표에 따르면 한국은 멕시코에 이어 연간 노동시간이 두 번째로 긴 것으로 나타난다. 연간 평균 2113시간인 한국에 비해 독일의 연간 노동시간은 1371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직장인들에게는 '칼퇴근' 보다는 잔업처리를 위한 '초과근무'나 '야근'이 어느덧 일상이 돼 버렸다. 평일 저녁 온가족이 함께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 것은 어쩌면 사치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우리 주위에 심심치 않게 있을 것이다.

이런 기존의 모습에도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워라밸(work-life balance)', '저녁이 있는 삶' 등이 한국사회 안에서 새로운 가치로 부각되고 있다. 국회도 지난달 근로시간을 주말을 포함해 최대 52시간을 한정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처리했다. 하지만 오는 7월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에게 적용될 이 개정안을 두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도 있다. 노동자들이 해야 될 '노동량'이 줄지 않은 상태에서 야기될 수 있는 편법들, 실질소득의 감소에 대한 우려, 그리고 사업별 특성을 고려한 탄력적 적용에 대한 논의 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근로시간이 단축된다고 해서 우리나라에 '저녁이 있는 삶'이 보장되는 것만은 아니다. 560만명을 육박하는 자영업자들의 워라밸을 국가가 통제할 수 있을까? 사교육의 지옥으로 매일 내쫓기는 청소년들과 취업의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이란 언감생심이지 않을까? 경제적 부담으로 인해 문화·예술생활이나 취미활동의 접근성에 제약을 지닌 근로자들을 위한 대안은 준비돼 있는가?

단순히 근로시간 단축만으로 국민 삶의 질이 향상됐다 말할 수는 없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여러 요소들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행복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가치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뒷받침 돼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정부와 국회는 근로시간 단축만이 아니라, 헌법에서 말하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호하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해 주기 위한 끊임없는 고민과 실천이 이뤄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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