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일제 강점기에 기업이나 교육사업을 하려면 어느 정도 친일 활동이나 묵시적인 동조를 해야만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고 나름 추측을 해왔다. 적극적으로 앞에 나서서 친일 행각을 주도하지는 않았더라도 항일 투쟁을 하면서 기업을 운영하기는 불가능하거나 어려웠을 거라는 짐작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후원한 애국 기업들의 일화가 알려지면서 이런 추론이 옳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부채표 활명수로 유명한 동화약품 창업자 민강 사장은 임시 정부에 군자금을 댔다. 삼엄한 감시로 돈을 전달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활명수를 중국으로 보내 독립운동가들이 팔아서 활동비로 쓰도록 하는가 하면 자신의 사무실을 임시 정부 서울 연락사무소로 사용하도록 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한 분이라고 한다. 독립 운동 연루사실이 발각되어 두 번의 옥고를 치르고 48세에 세상을 떠난 후에도 후대 경영자들 역시 창업주의 정신을 이어받아 활발한 항일활동을 벌인 동화약품은 지금도 성업 중이다. 흔치않은 경우겠지만 일제 치하에서 기업이나 사회활동을 영위하려면 친일이 불가피했을 것이라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어진 셈이다.

이런 미담을 접하고 보니 고등학교 시절 교주로 불렸던 분이 이즈음 훈장 서훈이 박탈되고 친일행적이 공론화되는 등 종전 명망이 무색해졌다. 자생적 민족 단체가 설립한 소규모 학교를 인수하여 본격적인 학교 체제를 갖추게 했고 당시 유명 전문학교와 유수의 기업을 창립했음은 물론 광복 후 정치활동 등으로 추앙받던 분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줄곧 더없는 애국애족 지도자라고 교육받고 그렇게 인식되던 분의 이미지 변전은 씁쓸하다. 졸업한 중학교 역시 구한 말 명성왕후 친족 한 분이 세운 학교였는데 그 분의 경우 재단 측에서 별다른 미화와 언급이 없어 그러려니 했지만 고등학교의 경우는 달랐다. 동문들 거의 대부분이 학교와 설립자에 대한 높은 긍지와 자부심으로 충만해 있었던 터라 더욱 착잡하다.

항일 독립 운동에 적극 동참한 120년 전통 기업의 번성을 보며 진정한 애국 애족의 의미와 가치를 되짚어 본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 전공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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