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칼럼]
허재영 충남도립대학교 총장

유재(留齋)는 추사 김정희가 그의 제자 남병길에게 지어준 호이다. 김정희는 현판에 유재라는 제목의 글을 남기고 있다. 김정희가 그의 제자 남병길에게 호를 지어주면서 글로 남긴 선물이라고 한다.

<留齋> 留不盡之巧以還造化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화(자연)로 돌아가게 하고 / 留不盡之祿以還朝廷 녹봉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 留不盡之財以還百姓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 留不盡之福以還子孫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

남겨 둔다는 의미는 내게 허용된 것을 소진하지 않고 후일의 필요에 대비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현재 소유하고 있는 재물이나 재능을 자기만의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며 그것이 나에게 정당하게 할당되었는지에 대해 숙고하지 않는다. 나에게 허용된 양이 얼마인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알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갖고 있는 기술이 이 세상을 완전하게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끝없는 훼손의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기술의 발달이 앞으로 맞이하게 될 우리 삶의 환경을 얼마나 더 풍요롭게 할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삶이 기술의 발달에 따라 편리하게는 되었으나 더 행복하게 되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따뜻해지기 위해서는 억제되거나 통제된 욕망, 즉 남겨 둠이 있어야 한다. 앙상한 감나무에 남겨놓은 까치밥처럼, 우리 부모님들이 자식에게 내어주는 희생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식량인 것처럼 말이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 남아있는 이삭은 우리 삶의 철학을 상징한다. 이삭은 여유롭지만은 않았던 농부들이지만 들판 위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의 식량조차 배려하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드러내는 것이다.

국가로부터 녹봉을 받는 자들은 그 녹봉마저 남겨두라고 유재(留齋)는 말한다. 그의 능력으로 받는 봉급이지만, 백성들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돈이므로 아껴 쓰고 남겨서 조정으로 돌려주라는 권고이다. 재물도 만찬가지이다. 국부는 국민들에 의해 만들어지며, 그 소유의 기회는 국민들에게 고르게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대개 부는 일부의 사람들에게 집중되고 권력과 결합된다.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 부의 집중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하였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나에게 주어진 재물조차 백성들에게 돌려주라는 유재의 가르침은 뼈아픈 지적이다. 주변에는 기본적인 생활조차 어려운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졌다고는 하지만, 빈부의 차이는 점점 커지고 있고, 갚을 수 없을 만큼 진 은행 빚 때문에 고통을 겪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과거에 우리에게는 잔칫날 찾아오는 걸인들에게도 융숭하게 상을 차려 대접하는 풍습이 있었다. 걸인들조차도 내치지 않고 우리의 이웃으로 대접하는 포용력은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귀중한 가치이다. 빈부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으며, 세상에는 행복하다는 말보다 고통스럽다거나 불행하다는 말이 더 많이 사용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강고하고 불편한 질서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가질) 것을 조금이라도 남겨두어서 누군가의 간절한 필요에 내어주는 너그러움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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