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 실험 대상이었던 헨리 몰래슨 이야기 다룬 신간 '환자 H.M.'

'하루하루를 새롭게 시작하는 남자' H.M.의 뇌를 둘러싼 싸움들

뇌과학 실험 대상이었던 헨리 몰래슨 이야기 다룬 신간 '환자 H.M.'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미국 코네티컷에 살던 헨리 몰래슨은 8∼9살 때 자전거에 치여 뇌를 다쳤다. 이후 수시로 간질 발작을 일으켰던 그는 1953년 8월 외과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발작증세는 사라졌지만, 그는 장기기억을 형성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어제에 대한 기억을 잃은 채 하루하루를 새롭게 시작하는 그의 이야기는 영화 '메멘토'의 모티프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헨리는 이후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됐고 인간의 뇌와 기억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생전 'H.M.'이란 이니셜로만 알려졌고 2008년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그의 실명이 공개됐다.

헨리의 이야기는 이미 여러 차례 소개됐다. 주로 헨리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와 헨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신간 '환자 H.M.'(동녘사이언스 펴냄)은 헨리의 이야기 뒤에 감춰진 이면에 주목하는 책이다. 저자 미국의 저널리스트 루크 디트리치가 헨리를 처음 수술했던 신경외과의 윌리엄 스코빌의 외손자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를 끈다.

스코빌은 헨리 이전에도 수백명의 뇌조직 일부를 제거하는 수술을 한 유명 의사였다. 1930년대 말 미국의 신경외과의들은 정신질환을 뇌엽절제술로 해결하려 했다. 이들의 연구 대상은 요양원에 수용된 정신질환자들이었다. 스코빌 같은 의사들에게 환자들은 '재료'였다. 요양원은 신경외과 의사들에게 환자를 '무제한 공급'했고 의사들은 이 공급이 허락하는 연구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헨리 이전 스코빌은 정신질환자들만 절제술을 했지만 간질증세만 있을 뿐 정신적으로 완전한 사람에게도 그 수술을 하면 어떨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질문은 헨리의 수술을 통해 답을 얻었다. 당시 스코빌은 헨리의 양쪽 내측측두엽에서 간질의 유발원인일 것 같은 표적을 찾지 못했다. 스코빌에게는 아예 손을 대지 않거나 어느 한쪽만 절제하거나 하는 선택이 있었지만 그는 양쪽을 모두 파괴하는 결정을 내렸다.

4년 뒤 1957년 5월 스코빌은 동료 브렌다 밀너와 발표한 논문 '양측 해마 손상 이후의 근시기억상실 H.M'에서 사람의 양측 내측두엽을 절제하면 근시기억이 영구적으로 손상되며 따라서 내측측두엽의 구조물들은 현재의 경험을 보유하는 일과 결정적으로 관련돼 있다고 발표한다.

이 논문은 이후 수십 년간 후속 연구를 통해 인정받았고 여러 면에서 연구의 토대가 됐지만, 헨리는 이 수술로 '어제가 없는 사람'이 됐다. 저자는 이 논문이 '헨리 몰래슨의 사망통지서이자 H.M.의 출생통지서'라고 표현한다.

헨리 이야기에 있어 또 다른 중요한 축은 그가 죽을 때까지 그를 '독점적으로' 연구했던 미국 MIT의 과학자 수잰 코킨이다. 저자는 어머니의 친구이기도 했던 코킨이 헨리 연구를 통해 큰 업적을 쌓고 명성을 얻었지만, 그 속사정에는 문제가 많았음을 지적한다.

코킨은 헨리의 생전에 헨리의 신원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사진과 비디오 촬영을 모두 엄격히 금지했고 외부와의 접촉도 엄격히 관리했다.

이에 대해 책은 그 이면에는 다른 동기도 있었을 것으로 지적한다. 헨리의 연구를 독점하고자 했던 것이라는 이야기다. 한 과학자는 "동물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언제든 쥐 몇 마리를 주문할 수 있지만, 인간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또다른 헨리를 절대로 찾을 수 없다"는 표현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코킨은 엄청난 명성을 쌓고 많은 연구자금을 지원받았지만 연구대상이었던 헨리에게는 요양원을 통해 하루에 1달러, 한달에 30달러만이 지원됐을 뿐이다.

코킨은 헨리의 사후까지 헨리를 소유하려 했다. 코킨은 헨리와 가깝지도 않았던 남성을 법정 후견인으로 만들고 헨리 사후 뇌표본 전체를 제거하고 보존, 사용할 권한을 MIT와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 기증하는 내용의 동의서를 받았다.

코킨은 헨리의 사후 그의 뇌를 캘리포니아대학(USSD)의 뇌 영상 전문가에게 보냈다. 헨리의 뇌는 사후 2천401개의 조각으로 절단됐다. 코킨은 이후 헨리의 뇌를 절단한 전문가와 5년 동안 갈등을 빚은 끝에 다시 헨리의 뇌를 돌려받기도 했다. 2016년 세상을 떠난 코킨은 생전 저자와 만남에서도 헨리에 대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연구 자료를 파쇄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저자는 외할아버지와 관련된 사람들부터 코킨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을 만나고 인터뷰한 결과를 바탕으로 의과학의 연구 현장, 의과학자들의 열정과 욕심, 의과학의 한계와 우리 정신의 한계, 의학 연구의 윤리적 문제 등 여러 층위의 문제들을 제기한다.

출판사 측은 "국내에 수잰 코킨의 책이 이미 번역돼 나와 있는 만큼 디트리치의 이 책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헨리 몰래슨을 둘러싼 이야기가 비로소 균형을 갖추가 됐다"고 소개했다. 김한영 옮김. 564쪽. 2만6천800원.

zitron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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