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과학포럼]
이성희 ETRI SW-SoC산업기술실 선임연구원


1997년 가을 어느 날 필자는 대학의 강의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잠시 딴 짓을 하던 필자를 교수님이 그냥 둘리 없었다. 교수님은 필자의 이름을 불러 질문을 던지셨다. 딴 짓을 하고 있던 필자는 그 질문의 정답을 알리 없었다. 정답을 아는 다른 학생들이 자신들이 대답하겠다며 손을 들었지만 야속한 교수님은 “난 저 학생에게 물어봤으니 저 학생 답변을 먼저 들어 보겠다”고 하셨다. 그 짧은 순간, 교수님이 원망스러웠다. “모를 걸 알면서 왜 대답을 듣겠다고 하시는 거지?”하면서… 필자는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창피함에 그 위기를 벗어나겠다는 생각만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끄집어내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게 정답일리 없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필자는 교수님의 꾸짖음을 마음 비운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교수님은 뜻밖에도 필자의 엉터리 답변에도 꾸짖지 않으시고 진지하게 생각해주시면서 교수님 자신은 다르게 생각하니 다른 생각들을 들어보자고 말씀하셨다. 아 이건 뭐지? 한없이 밀려오는 이 고마움. 존중 받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분명 잘못을 했는데 그런 필자의 기를 끝까지 살려주신 교수님이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그 고마움에 필자는 그 교수님을 좋아하게 됐고, 엄청난 잠재력이 폭발해 학기가 끝날 때 필자는 그 과목에서 최우수 성적을 받게 되었다.

미국에 있을 때, 언어문제는 필자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욱이 필자가 처음 있었던 미국 동부는 서부에 있는 미국인들에 비해 유색인종에게 덜 관대한 편이었으니 영어로 대화할 때 온몸에 힘이 들어갈 정도로 긴장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재밌었던 사실은 필자처럼 영어를 외국어로 사용하는 동남아·일본 사람을 미국에서 만나 대화를 하면, 놀랄만한 영어실력이 나왔던 것이다. 그 순간 영어가 늘었구나 생각하다가도 다시 원어민을 만나면 온몸이 굳은 채 한없이 작아졌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 어느 날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 해답을 찾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바로 마음가짐이 문제였다. 원어민을 만나면 부담이 됐고, 동남아·일본 사람을 만나면 저들도 필자처럼 영어를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훨씬 편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이 내면에서 놀랄만한 언어적 능력들을 끄집어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필자는 ETRI에서 연구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다. 요즘은 연구 환경이 점점 힘들어진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정부출연연구원들의 연구 성과 얘기도 많이 듣는다. 필자는 이와 같은 일들이 위에서 열거한 경험과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정부출연연구원에 근무하는 연구원들은 과학기술, ICT 등 관련 분야에서 전문가로 손꼽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국가 경제를 책임지는 시대는 지난 것 같다.

이제는 새로운 분야에서 국가와 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원천기술을 개발하는 역할과 책임이 부여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연구원들에게 좀 더 안정적인 연구환경을 마련해 주고 신뢰해 준다면 좋은 연구 성과로 보답할 것이라 믿는다.

우리나라 사회 자체가 좀 더 성숙해 격려해주는 문화가 우선시 되었으면 좋겠다. 연구원들이 사기가 충천하고 마음이 편해진다면 분명 엄청난 잠재력을 보여줄 것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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