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컨텐츠진흥팀장

지난해 가을, 나는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어슬렁거렸다. 몇 해 전에 충북의 아름다운 비경을 글과 그림과 사진으로 펴낸 책 ‘즐거운 소풍길’이 문화부 우수도서로 선정됐는데, 이 책 때문에 바사노라는 작은 도시에서 열리는 사진비엔날레 초대작가로 가게 된 것이다. 당연히 공동 저자인 사진작가와 화가가 함께 동행했고, 내친 김에 이탈리아의 속살을 훔쳐보자고 작당했다.

사진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는 바사노는 도시가 곧 역사이자 문화요 예술이었다. 500년 된 고택을 주전시장으로 활용하고 호텔과 식당과 거리에도 작가의 작품으로 가득했다.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햇살이 반짝이고 사람들은 이야기꽃을 피었다. 수상도시 베니스도 마찬가지다. 베로나는 역사와 공간, 인문학과 예술, 음식과 관광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오래된 건축마다 그들의 진하고 애틋한 삶이 담겨 있고, 발 닿는 곳마다 인문정신과 예술세계로 가득했다. 사람들의 풍경도 여유롭고 넉넉했다. 도시의 공간과 자연, 사람들의 표정과 움직임 하나하나가 아름다웠다. 발 닿는 곳마다,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서로 다른 멋과 맛과 향기가 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여러 날 앓는 버릇이 있다. 내가 숨쉬고 있는 이 땅은 거칠고 건조하며 불안하기 때문이다. 당장의 이익과 욕망과 성과에 얼룩져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우리의 삶이 현명해질 수 있을까.

문재인 정부가 문화비전 2030을 발표했다. '사람이 있는 문화'다. 사람을 위해,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만들어가겠다는 것이다. 뼈아픈 자기반성에서 시작된 것 같다. 자율성, 다양성, 창의성이 핵심전략이다.

나는 오랫동안 지역문화 현장 최전선에서 일했다. 기쁨과 영광도 있지만 아쉬움과 미련도 적지 않다. 지역의 문화환경은 척박하다. 수많은 갈등요소들과 모순된 일들이 지뢰밭처럼 깔려있다. 자본과 문화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자본은 자기증식의 성격이 강하지만 문화는 더불어 행복을 추구한다. 자본은 욕망의 결과물이지만 문화는 삶을 행복하게 하고 향기와 여백의 미를 준다. 그렇지만 사람이 있는 문화는 구호로 완성되지 않는다. 삶에 젖고 스미며 물들 때 비로소 완성된다.

사람이 중심이어야 한다. 문화계에도 갈등과 대립, 단절과 불균형이 심하다. 사람을 강조하지만 정작 문화예술 현장의 사람은 춥고 배고프고 외롭다. 짓밟히기도 한다. 행정의 갑질이 난무한다. 나는 문화현장에서 피를 토하며 이 모든 것을 절감했다. 문화현장의 전문인력을 키우고 존중해야 한다. 행정의 잣대로 문화를 보지말고 문화의 시선으로 현장을 봐야 한다.

이벤트성·일회성 행사를 지양하고 삶이 곧 문화인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맞춤형 문화교육, 문화향유가 필요하다. 문화로 행복하고 문화로 치유하고 문화로 하나돼야 한다. 천편일률적인 지역문화를 차별화하고 특화해야 한다. 지역의 인재·역사·축제·공간이 더욱 빛나야 한다. 지역의 문화가 세계의 문화이어야 한다. 단기적인 지원시스템에서 중장기적인 지원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 일자리와 정규직을 부르짖지만 정작 문화계는 남의 얘기처럼 들린다. 문화현장의 옥석을 가리는 일도 중요하다. 값진 문화의 콘텐츠를 발굴하자는 것이다. 문화는 우리 삶의 시작이자 끝이다. 우리 모두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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