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기 제천 청암학교장
[수요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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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가을, 낯설고 물선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이국에서의 고생길이 시작됐다. 다행히도 먼저 큐슈 대학으로 유학을 온 교육부 박(福岡朴) 선생이 이것저것 잘 챙겨줬다. 일본에서의 첫 날 두 가지 놀랄 일이 있었다.

가장 먼저 외국인 등록을 하던 중 주민센터에서 박 선생의 일본어 실력에 놀랐고 기도 죽었다. 걱정되는 와중임에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박 선생과 우리 부부는 조그만 식당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물과 컵을 가져다주는 분은 연세가 팔십도 넘어 보이는 허리 굽은 할머니였다. 가족끼리 운영하는 식당인 줄 알았는데 그 할머니가 '알바생'이었다는 사실에 두 번째로 놀랐다.

어릴적 시골 마을에서 제일 부잣집 아이는 이 씨 성을 가진 초등학교 동기였다. 당시는 모두가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그 집은 어느 날 갑자기 부자가 됐다. 그 집이 부자가 된 것은 해방 전에 일본으로 도망쳤던 할아버지가 20여년 만에 부자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스피커만 가지고 있던 그 시절 그 집엔 라디오가 있었다. 당시는 일제(日製)라면 사족을 못 쓰던 우리였다. 일본의 졸부(猝富)들은 '기생파티'로 자존심을 짓밟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일본은 '나라만 부자'라는 말이 생겼고 선뜻 이해가 되지 않던 이 말을 일본에서 실감했다. 1991년까지 거품경제와 그 후 '잃어버린 10년'을 겪은 일본이다. 현재 일본 국가예산의 국채 의존도는 약 35% 정도다. 우리도 올해 예산의 국가채무 비율은 40% 근처에 이른다. 현재의 일본은 우리가 부러워 할 나라가 아니다. 나라가 부자인 것과 국민이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는 다른 차원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우리가 서서히 일본이 걸었던 길을 따라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조절이 안 되는 청소년 문제, '밀수입'된 이지메가 왕따로 변해 우리 교육의 큰 과제가 된 것, 가족중심사회의 쇠퇴, 분별없는 성(性) 개방풍토 등 사회 곳곳의 이상한 것들이 미국에서 일본을 거쳐 우리에게로 들어온 것 같다. 고정적 국방예산에다가 늘어만 가는 복지예산이 나라 살림을 옥죈다. 공무원과 교직원의 연금제도가 얼마나 지속될 지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아니 공무원과 교직이 3D업종에 들어갈지 모른다는 성급한 위기감도 있다. 서독에서의 광부와 간호사, 파월 장병, 노동자 농민의 희생 위에 우뚝 섰던 과거는 다 잊은 듯하다.

기업은 해외로 눈을 돌린다. 며칠만 알바 뛰면 일주일을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됐다. 되지도 않는 취업을 위해 머리 싸매고 공부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수저' 색깔이 정해져 있는데 열심히 저축할 필요도 없다. TV에서는 '욜로(YOLO)'를 부추긴다.

우리 '꼰대'들은 살만큼 살았다. 젊었을 땐 배고팠지만 지금은 그렇진 않다. 자식들, 나아가 30년, 50년 뒤의 후손들이 걱정이다. 왕년에 잘 나가던 꼰대들이지만 이젠 삼겹살도 버겁다. 시장 안 대폿집에서 빈대떡과 막걸리로 이마에 핏대 올리며 나라를 걱정한다. 하지만, 자수성가를 위해 힘차게 청춘을 바쳐왔던 뒷모습이 오늘은 꽤나 무거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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