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춘추]
송현동 건양대 글로벌호텔관광학과 교수


영화 1987년에 등장하는 박종철의 죽음은 좋은 죽음이 아니다. 전통사회에서 한국인은 좋은 죽음과 그렇지 않은 죽음에 대한 태도를 갖고 있다. 좋은 죽음은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아 제사를 지내줄 후손이 있는 상태에서 천수를 누려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그렇지 않은 죽음은 결혼을 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요절, 비명횡사, 집 밖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객사에 해당된다. 옛말에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그래서 가장 큰 불효는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이다. 또 박종철의 죽음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의 삶이 시대적인 상황과 맞물리면서 누군가에게 의해 빼앗긴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에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나는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 자신은 정작 죽지않고 수많은 희노애락을 겪으면서 마침이 없는 시간을 보내야하기 때문이다. 문득 이런 질문을 해본다. 신은 행복할까? 죽음은 인간에게 ‘시간’의 개념을 인식하게 했다. 인간은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일의 우선순위가 인간에게는 중요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후회하는 것은 지금 해야 할 것과 다음에 해야 할 것의 우선순위를 잘못 결정하는 데서 발생한다. 어쨌든 죽음은 인간에게 시간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죽음은 인간에게 ‘의미’의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한번뿐인 삶은 인간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항상 고민하게 한다. 삶의 방식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고 그것이 다소 잘못된 선택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선택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 어떤 것으로도 타인이 나의 삶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삶은 유한하고 단 한번뿐인 일회성의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인간의 ‘문명’을 발전시켰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죽음의 원인은 다양하다. 인간은 역사이래로 다양한 죽음의 원인을 제거시키거나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요 문명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단 한번뿐이고, 불가역적인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소중하다. 이제 2018년에는1987년 박종철의 죽음과 같은 시대적인, 개인적인 아픔을 교훈삼아 단 한번뿐인 유한한 삶이 성별, 연령, 학력, 경제적 소득, 외모에 의해 빼앗기고, 억압 받고, 차별받지 않는 원년(元年)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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