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억수 충북시인협회장
[에세이]


설이 다가오자 아내가 무척 예민해진 것 같다. 짜증도 늘었으며 잔소리도 심해진다. 대청소를 해야 한다며 온통 집안을 뒤집어 놓는다. 이런 때는 그저 눈치를 보면서 비위를 맞추는 게 상책이다. 아내는 종갓집 맏며느리다. 6대 종부(宗婦)의 삶이 그리 녹록하지 않을 것이다. 설날 대가족이 모여 차례 지낼 준비를 해야 하니 경제적인 부담과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잘하든 못하든 집안의 대소사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나는 전통적 가풍을 이어가는 종손으로 태어났다. 순종을 미덕으로 여필종부 하신 어머님을 보고 자랐다. 그래서 아내가 종부의 소임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집안에 일이 생기면 나는 아내에게 슬쩍 떠밀어 주고 “당신이 알아서 해”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내의 눈치를 보게 된다.

옛날이야 늘 많은 가족끼리 부대끼며 생활했기 때문에 명절이라고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핵가족으로 단출하게 지낸다. 맞벌이 시대다. 대부분 여자도 사회 활동을 한다. 그러다 보니 명절이 집안 친척들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되었다. 명절날 갑자기 많은 친지가 모인다. 그러니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다. 명절이면 차가 꼬리를 물고 고속도로를 가득 채운다. 올해도 귀향길은 순조롭지 못할 것 같다. 명절 기간에 스트레스를 받아 생기는 육체적·정신적 증상이 명절증후군이다.

며칠 전 오른쪽 눈이 침침해 안과를 갔다. 망막박리였다. 바로 수술을 했다. 수술 후 2주를 24시간 엎드려 생활해야 한다. 집안에 환자가 있거나 우환이 있으면 차례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사례편람’에 "무릇 제사는 지극한 애경지심이 중요하며 가빈(家貧)이면 형편을 헤아려할 것이고 병이 있으면 제사를 치를 근력이 있는지 살펴 행하고 재력이 충분하면 마땅히 의절을 따를 것이다"라고 기술돼 있다. 제사는 돌아가신 조상을 추모하는 의례다. 나는 아내에게 “종손으로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조상을 추모하여야 도리인데 병중이니 이번 설은 차례를 지내지 말자”고 했다. 아내는 안색이 변하며 “명절이 아니면 언제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이겠느냐. 괜한 소리 말라”한다. 한편으로는 머쓱하고 고맙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명절이면 스키장이나 온천을 찾거나 국외여행을 즐기면서 여행지에서 간단히 차례를 지낸다는 말도 들린다. 점점 명절의 의미가 축소되고 연례행사의 방편이 되어간다. 친척들도 설날 아침 차례를 지내고 성묘길 나서기도 전에 교통체증을 피해야 한다며 서둘러 돌아가기 바쁘다. 그래도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다녀가는 친척이 고마울 따름이다.

아내는 종부이다. 설이 다가오면 차례에 필요한 음식 준비를 해야 한다. 차례 후 뒤처리의 정신적·육체적 부담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심리적 부담감과 피로감으로 명절 증후군을 앓는다. 명절 증후군은 아내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도 아내 비위 맞추고 동생들의 화합을 위해 애써야 한다. 홀로 계시는 어머님 서운하지 않게 해 드려야 한다. 6대 종손으로서 품위도 지켜야 한다. 어찌 여자만 명절 증후군에 시달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남자도 명절 증후군을 앓는다. 아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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