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묵 대전시 개발위원회장
[경제인칼럼]


세상이 많이도 변했다. 정보화 사회를 입에 담을 필요조차 없이 일상 자체가 정보 속에서 지탱하고 있다. 소통을 위한 통신기기가 범람하면서 몇 천 년 동안의 변화보다 최근 50년의 변혁이 더 크다고 혀를 찬다. 남보다 빨리 정보를 얻음으로써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앞설 수 있는 세상이다. 가히 정보 천국이 됐다.

짧은 잠에서 나오든 긴 잠에서 나오든 기상과 동시에 하는 행동은 기지개를 켜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와의 상면이다. 자신이 잠든 사이에 찾아온 사람을 점검하고, 찾아온 이의 사연을 접하고, 그에 답을 전하는 일에서부터 하루를 열어간다. 이것에 게으르면 나태한 사람이란 누명을 쓰게 되고, 달려가는 대열에서 낙오하고 만다. 그런데 그렇게 달려오다 보니, 인간이 기계의 주인이 아니라 기계의 머슴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감정이 말라 버리고, 사람 냄새가 사라졌다. 소통에 장애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다. 이에 전율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메말라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른 이에 대한 예의’라고 변명한다. 이어폰이 자신의 세계에 빠지기 위한 도구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당신의 세계를 넘보지 않는다는' 배려이고 예의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난 알지 못한다며 세상과의 단절을 합리화하며 살아간다. 오로지 '우리'는 없고, '나'만 존재하는 세계를 꾸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이라 해도 인간사회와의 완전한 단절은 불가능하다. 이 어려움도 아주 쉽게 자기 위주의 사고로 풀어간다. 내가 관심 없어 하던 세상 이야기도 느닷없이 필요하면 '알 권리'를 내세우며 요구한다. 너무도 이기적인 사고로 편리하게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이다. 철저한 자기 위주의 사고에, 감정이 메말라버린 개인주의가 철갑을 두르고 우리 곁에 와 버티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세상이다. 전에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봐도 작중인물을 자기화하여 보았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체험했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드라마를 보면서 눈두덩을 훔쳤다가는 '예의 없는 천연기념물'로 오인 받는다.

정말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앞집의 가슴 아픈 사연에도 관심을 주고, 뒷집의 허물에도 눈감아 주며, 서로 격려하고 북돋아주며 살아가자고 말하면 부정이나 저질을 사람으로 취급 받는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낙오하게 된 사람도 끌어당겨 주고, 주저앉은 이도 일으켜 세워 같이 달려간다면 분명 이 사회는 밝아질 것이다. 모든 이의 힘이 한데 어우러져야 발전의 원동력도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요즘은 연말이나 명절이 다가와도 이웃에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거의 없다. 경제가 어려워서 그렇다고는 하지 말자. 더 어려운 시절에도 이웃을 위해 나섰던 민족이다. 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커 왔다. 지금은 이런 말조차 없다. 오직 '나'만 있고, '우리'가 없는 세상이니 그런 말이 남아 있을 리 없다. 이쯤에서 우리의 엉클어진 자화상을 들여다본다. 귀에 박힌 이어폰도 빼고, 이웃의 아픔도 들어주는 진정한 인간이길 소망한다. 이번 설 명절에는 어려운 이웃이 내 곁에도 있음을 기억하여 따뜻한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람 냄새가 전달되는 삶으로 되돌아갔으면 좋겠다. 자그마한 정성으로 서로 정을 나누며 이웃이 있음을 새기는 명절이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손 편지 한 장이라도 끼워 보내면 더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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