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봉 충북NGO센터장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술자리가 더 늘었다. 늘 봐왔던 사람들이지만 행복을 빌고 건강을 기원하며 다가올 새로운 날들에 대해 덕담을 주고받는 자리를 가지게 된다. 이런 자리에서 꼭 거치게 되는 절차가 있다. 돌아가며 건배사를 해야 하는 것이다. 보통 그 자리에 모인 사람 중 연장자가 덕담을 버무린 건배사를 하고 나면 나이나 직급 순서대로 건배사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좋은 건배사는 술자리의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리기도 하고 참가자들의 단합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 건배의식이 나는 여간 곤욕이 아니다. 좀처럼 익숙해 지지 않는다. 친구끼리의 술자리나 순수한 친분에 만들어진 자리에서는 건배사를 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한다고 해도 부담 없이 한마디 할 수 있다. 하지만 공식적인 모임 후 가지게 되는 회식이나 뒷풀이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모두를 만족시키면서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센스 넘치는 나만의 건배사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술자리가 가시방석이다.

전화나 화장실을 핑계로 자리를 비우는 잔꾀를 내어봐도 건배사를 피할 수는 없다. 하여튼 술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건배사를 하고 나서야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한 취업포털 사이트가 직장인을 대상으로 건배사와 관련해 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건배사로 인해 술자리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이 51%나 된다고 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술자리의 분위기를 위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이다. 부담은 있으나 사실 건배사가 없는 술자리는 왠지 싱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서로 격려하고 감사하고 즐거움을 주는 건배사에는 악의적인 나쁜 말이 없는 것도 좋다.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하는 건배사를 들어본 적은 없으니까.

건배를 하는 것은 신에게 술을 바치고 건배를 하며 죽은 사람을 위로하는 종교적 의식이었다고도 하고, 옛날에는 뾰족한 술잔을 사용해 잔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건배를 하는 이유는 상대방의 진심을 이해하고 인정하기 위해서 그리고 나와 네가 하나라는 공동체임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건배사의 주제는 무한하다. 건강을 위하여, 성공을 위하여, 행복을 위하여, 사랑을 위하여 등등 끝이 없다. 찾아보니 건배사를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톡톡 튀는 건배사를 모은 앱도 있고 500페이지에 다다르는 건배사를 해설하는 건배사 모음 대백과라는 책도 있다. 둘러보니 건배사가 수도 없이 많다. 앞글자만 따서 줄임말로 하는 유형이 있다. 이를테면, 해당화는 해가 갈수록 당당하고 화려하게 살자라는 뜻이고, 오바마는 오직 바라고 마음먹은 대로 일이 잘 풀려가라는 뜻이다. 건배자와 참석자들이 말을 주고받는 방법으로 하는 건배사도 있다.

술잔은/비우고 마음은/채우고 전통은/세우자, 선배는/끌어주고 후배는/밀어주고 스트레스는/날리고 라고 말하는 식이다. 유치하다고 생각되지만 술자리가 무르익은 시간에 하나된 분위기를 위해서는 최고의 효과를 내는 건배사가 아닌가 싶다. 예전에도 술자리는 술만 마시는 자리가 아니라 술꾼들이 마음을 나누는 자리였나 보다. 건배사는 흥겨운 술자리에 최고의 안주이다. 진솔하게 담담히 내 마음을 전달해 보자. 톡톡 튀는 건배사가 아니어도, 주목 받지 못하는 건배사일지라도 모두의 행복을 바라는 내 마음을 술잔에 채워보자. 그래도 떨리고 부담스럽다면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창에 건배사라 적으면 된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