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형 제주작가회의 회장 "4·3 70주년…제사 지내는 마음으로 시 써"

▲ [삶창 제공=연합뉴스]
▲ [삶창 제공=연합뉴스]
▲ [이종형 시인 제공=연합뉴스]
▲ [이종형 시인 제공=연합뉴스]
▲ (제주=연합뉴스) 지난해 7월 15일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16회 제주4·3행방불명희생자 진혼제에서 혼비무용단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무를 선보이고 있다. 2017.7.15
▲ (제주=연합뉴스) 지난해 7월 15일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16회 제주4·3행방불명희생자 진혼제에서 혼비무용단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무를 선보이고 있다. 2017.7.15
제주 4·3 아픔 보듬는 시집…'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이종형 제주작가회의 회장 "4·3 70주년…제사 지내는 마음으로 시 써"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당신은 물었다/봄이 주춤 뒷걸음치는 이 바람 어디서 오는 거냐고//나는 대답하지 못했다//4월의 섬 바람은/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 같은 것" (시 '바람의 집' 도입부)

우리 현대사 비극의 한 페이지인 1948년 4월의 제주를 경험한 사람은 이제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그 원혼과 씻기지 않은 아픔은 7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남아있다. 제주의 문인 이종형(63) 시인이 펴낸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삶창)은 이런 상처와 아픔을 껴안으려는 시인의 진실한 영혼이 담긴 시집이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 '바람의 집'은 이렇게 이어진다.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돌담 아래/제 몸의 피 다 쏟은 채/모가지 뚝뚝 부러진/동백꽃 주검을 당신은 보지 못했겠으나//섬은 오래전부터/통풍을 앓아온 환자처럼/살갗을 쓰다듬는 손길에도/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4월의 섬 바람은/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뼛속에서 시작되는 것//그러므로/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바람의 집이었던 것"

시인은 이렇게 제주의 봄, 예쁜 꽃과 쪽빛 바다만 보게 되는 외지인들에게 그 안쪽의 보이지 않는 통점이 있음을 일깨워준다.

"햇살이 쟁쟁한 팔월 한낮/조천읍 선흘리 산 26번지 목시물굴에 들었다가/한 사나흘 족히 앓았습니다//들짐승조차 제 몸을 뒤집어야 할 만큼/좁디좁은 입구/키를 낮추고 몸을 비틀며/낮은 포복으로 엉금엉금 기어간 탓에 생긴/통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그해 겨울 좁은 굴 속의 한기보다 더 차가운 공포에/시퍼렇게 질리다 끝내 윤기 잃고 시들어 간/이 빠진 사기그릇 몇 점/녹슨 솥뚜껑과/시절 모르는 아이의 발에서 벗겨진 하얀 고무신" ('통점' 중)

제주 4·3 평화공원에 세워진,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각명비'를 바라보며 시인은 울음소리를 듣는다.

"손으로 더듬어야 읽히는 점자책처럼/겨울 지나 봄이 오는 동안, 숲에선/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다//꽃과 나무들이 대신/비명을 질렀고,/입 닫은 자들만이 그 소리를 들었다//통곡은 비와 바람의 몫/주검은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사이에서/오래도록 수습되지 못했다//섬이 초가지붕보다 더 납작 엎드려/숨죽은 시절/공포는 엄동의 한기처럼/때로는 팔월의 폭염처럼/얼다, 녹다, 짓무르다/더러 잊히고/더러 외면되었는데//4·3 평화공원/각명비 위에/내려앉은 산까마귀 한 마리/검은 부리로 톡톡, 그 겨울의 이름들을/다시 새기고 있다" ('각명비' 전문)

2004년 제주작가회의 기관지 '제주작가'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한 시인은 이후 쓴 시들을 모아 14년 만에 첫 시집을 냈다. 40대 중반에 늦깎이로 시 세계에 입문한 그는 4·3에 관한 시들을 쓰며 "태어나고 살아온 내력과도 마침내 화해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시인은 22일 연합뉴스와 전화 인터뷰에서 4·3을 시로 쓰게 된 배경을 이렇게 소개했다.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지만, 제 출생사 뒤에 4·3의 그림자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48년도에 발생한 4·3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까지 제주도민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어요. 저희 외가도 한라산 중턱 산간 마을에 있었는데, 4·3으로 여러 마을이 불타면서 주민들이 해안가로 이주할 때 옮겨오게 됐죠. 그런데 당시 군인으로 제주에 내려와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인연을 맺게 돼서 1955년에 제가 태어난 거예요. 4·3과 한국전쟁이 아니었으면 육군이 제주에 주둔할 일이 없는데 말이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저는 이런 개인적 아픔으로 관심을 두게 됐는데, 4·3이 많은 이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걸 알게 되면서 더 천착하게 됐어요."

학창시절 문예반 활동을 하며 시를 애송하던 그가 20여 년 만에 첫사랑과 다시 만나는 느낌으로 쓰게 된 시는 자연히 4·3 영령들을 위로하는 시가 됐다.

"시 한 편 한 편을 제사 지내는 마음으로, 술 한 잔 따라 올리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굉장히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직설적으로 발언하기보다는 차분하고 서정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이전에 나온 시들을 보면 죽창이 나오고 피 냄새가 나는데, 이제 70년이면 그런 것에서 벗어날 때도 됐다고 생각합니다. 현기영(소설가) 선생님도 제주 문인들에게 '이제는 고발에서 벗어나 다른 목소리, 다른 방식의 4·3 문학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거든요. 저도 그런 맥락에서 부드러운 톤으로 쓰려고 합니다."

그는 등단 이후 제주작가회의에서 사무국장 등 행정·기획 업무를 맡아 부지런히 일해왔다. 특히 2007년부터 베트남 문인들과 교류 활동을 하면서 베트남에서 자행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에 주목하게 됐다. 이후 베트남을 수차례 오가며 공감과 연대의 마음을 담은 시들을 썼다. '카이, 카이, 카이'(베트남어로 '증언하겠다'는 뜻), '눈과 손' 같은 시들은 베트남인들의 절절한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시들이다.

"한국인 참배객을 태운 버스가 쯔엉탄 학살 위령관을 떠나려는 순간/3킬로를 자전거로 달려와 땀범벅이 된 한 사내가 다급히 버스를 막아서고는/카이, 카이, 카이(khai, khai, khai)/내 말 좀 들어달라고, 나도 말 좀 하게 해달라고 소리쳤습니다.//내가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엄마, 누나, 할머니, 친척들이 방공호에서 다 죽었어요./왜 한국 사람들이 여기까지 오고도 우리 마을에는 안 오는지 너무 억울해서 왔어요./(중략)/쯔엉탄 아랫마을 깟흥사 미룡촌에서 태어난 판 딘 란/떨리는 목소리로 태어난 지 사흘 만에/호랑이 표식을 단 남한 병사에게 어미 잃은 사연을 얘기하는데/꼬박 오십 년이 걸린 거였습니다." ('카이, 카이, 카이' 중)

"눈을 잃고서/열 개의 눈이 다시 몸에 돋아난 사내의 손을 마주 잡아본 적 있나/손바닥으로 건네지는 감촉만으로 오래전에 만난 사람도 기억해내는/낯선 언어를 다만 따뜻한 체온만으로 충분히 알아듣는/그런 사내를 만나본 적 있나//수류탄에 몸이 찢긴 어미 옆에서/울다 울다 지친 어린 눈동자에 화약 스며들었던 그날 이후/가난한 마을이 키워낸 아이 도안 응이아여/기억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지/소망한다는 것은 바로 너의 손바닥 같은 것이야" ('눈과 손' 중)

시인은 지난 13일 제주작가회의 신임 회장으로 선출됐다.

"4·3 70주년을 맞아 오는 4월 26∼28일 '전국문학인대회'를 엽니다. 베트남, 일본 오키나와, 대만 등 해외 문인들도 참여하는 500명 규모의 행사를 준비하고 있어요. 연구자들도 함께하는 심포지엄을 열어 4·3의 역사적 의미와 문학적 과제를 논하려고 합니다."

mi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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