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프로덕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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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활기로 가득했던 무대"…선우예권 리사이틀 리뷰

(서울=연합뉴스) 최은규 객원기자 = 그가 피아노 앞에 앉자 콘서트홀은 건강한 활기로 가득 찼다. 탁월한 리듬감과 절묘한 타이밍 감각을 보여준 그의 피아노 연주는 마치 뛰어난 배우의 흥미진진한 모노드라마 같았다. 대사 하나 눈짓 하나에도 청중을 울고 웃게 하는 명배우의 연기처럼, 그가 만들어낸 음표 하나하나는 명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지난 15일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이후 처음으로 개최한 첫 리사이틀은 수많은 음악애호가를 공연장으로 불러들였다.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객석은 그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려는 관객들로 꽉 들어찼고, 마지막 앙코르 연주가 끝나자 관객들은 기립 박수로 환호했다. 공연 후 연주자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 늘어선 줄은 끝없이 이어졌다. 선우예권은 국내 음악애호가들의 이런 관심과 기대에 부응하는 화려한 연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레인저가 편곡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 주제에 의한 '사랑의 듀엣'으로 분위기를 조성한 선우예권은 곧바로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훌륭하게 소화해내며 귀를 사로잡았다.

그가 선택한 '소나타 제19번 다단조 작품 958'은 슈베르트가 그의 말년에 완성한 3대 걸작 피아노 소나타 중 한 곡이다. 베토벤을 연상시키는 1악장 도입부의 강렬한 리듬 덕분에 대개 이 소나타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들은 첫 주제에서부터 힘을 잔뜩 준 강한 소리로 제1주제를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선우예권은 더도 덜도 말고 포르테(forte, 강하게) 하나만 표시된 강약기호 그대로 과장하지 않고 담백하게 제1주제의 연주를 시작했다.

제1주제에 이어 경과구가 지나고 제2주제에 이르면서 선우예권 특유의 연주법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왼손의 움직임이 명확하고 음과 음 사이가 또렷하게 분절되는 그의 연주 덕분에 슈베르트의 소나타가 얼마나 정교한 짜임새를 지니고 있는지 잘 드러났다. 그의 피아노 연주를 '말하기'에 비유한다면, 그것은 발음이 매우 정확하고 표현력이 뛰어난 성우의 입체낭독이나 다름없었다. 왼손이든 오른손이든, 그의 손이 만들어낸 음표들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이번 음악회에서 선보인 곡들 가운데서도 라벨의 '라 발스'는 그의 개성과 장점을 매우 잘 보여주었다. 작곡가 라벨이 비엔나 왈츠에 대한 존경을 담아 작곡한 이 곡은 매우 독특한 왈츠다. 왈츠 리듬의 단편만 들려오는 도입부로부터 점차 화려하고 격정적인 왈츠로 발전해가는 이 곡에 대해 라벨은 "소용돌이치는 구름 사이로 왈츠를 추는 남녀들이 어렴풋이 보인다. 점차 구름은 흩어지고 왈츠를 추는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홀을 볼 수 있다.…이윽고 포르티시모에서 샹들리에의 불빛이 휘황찬란하게 빛을 발한다"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이런 과정은 선우예권의 생생한 피아노 연주로 더욱 드라마틱하게 표현되었다.

선우예권은 마치 피아노를 오케스트라로 바꿔놓은 듯 다채로운 음색과 표정을 살려내며 무도회장에서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현해냈다. 애매모호한 도입부에 이어 마치 무도회장의 샹들리에를 점화하듯 섬광과 같은 충격적인 소리로 본격적인 무도회의 시작을 알린 그는 때로는 한숨을 짓듯 애틋한 소리로, 때로는 폭발적이고 격정적인 소리로 무도회의 분위기를 다채롭게 표현했다. 왈츠의 소용돌이라 할 만한 이 곡 후반부부터 충격적인 종결부에 이르기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압도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다.

라벨의 '라 발스' 연주를 마친 그는 리스트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라 캄파넬라'를 비롯한 무려 다섯 곡의 앙코르곡을 연주하며 관객들의 환호에 답했다.

선우예권의 이번 리사이틀은 이제 갓 국제콩쿠르에서 두각을 보여 주목받게 된 신예 피아니스트의 무대라기보다는 연주 경험이 풍부한 숙련된 피아니스트의 화려한 무대라 할 만했다. 오랜 세월 기량을 닦고 경험을 쌓아온 그가 세계 권위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 우승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 우승하고 나서야 이와 같은 주목을 받는다는 것이 이상한 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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